1927년 5월20일 아침 8시 조금 전에 린드버그가 '세인트루이스
정신'을 타고 파리를 향해 뉴욕을 떠났다. 26년에 레이몬드 올테
그라는 호텔경영자가 역사상 처음으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비행사
에게 상금 2만5000달러를 주겠다는 광고를 낸 이후 무려 6명의 비
행사가 목숨을 잃고 있었다. '세인트 루이스'호는 33시간 30분 후
파리의 루 부르제 비행장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쿠울리지 미국
대통령은 이 젊은 영웅과 그 비행기의 자랑스러운 귀국을 위해 순
양함을 보냈다. 이로부터 12년후인 39년 6월28일 판 아메리칸 항
공이 미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최초의 상업비행을 개시했다. (홍사
중 조선일보 논설고문).


사진설명 :
대서양 횡단 단독 비행에 성공한 린드버그와 비행기 '세인트 루이스정신'호.

비행기로 대서양을 처음 횡단한 사람은? 찰스 린드버그. 중간

에 한번도 착륙하지 않고 대서양을 비행한 최초의 인물은? 찰스

린드버그. 하지만 둘다 틀렸다.

이미 1919년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 비행사들이 있었다.그
런데 그들의 이름은 기록에 없고, 린드버그만 남았다. 왜냐하면
린드버그가 처음으로 혼자서 대서양 횡단 무착륙 비행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린드버그의 위대함은 '홀로서기'에 있었다.

"비행기는 일단 이륙하고 나면 내 신체의 연장인 것 같다. 내
손이 마음의 욕망을 따라 움직이듯 비행기는 내 소망을 따라간다.
그것은 강철로 만든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파트너같다.".

옛 영웅들은 말을 타고 대륙을 관통했지만, 린드버그에겐 비행
기가 살아있는 천마였다.

1927년 5월20일 오전 7시54분 뉴욕의 루즈벨트 필드. 린드버그
는 '세인트루이스 정신'호를 하늘에 띄웠다. 그의 천마는 시속 120
마일로 쉬지 않고 33시간 30분 동안 하늘길을 달려 파리에 착륙했
다. 비행거리 3,614 마일이었다. 린드버그는 폭풍과 안개를 헤쳐
야 했고, 수마와 사투를 벌여야했다. 낯선 길을 혼자서 간다는 두
려움이 컸지만, 새로운 길을 트겠다는 희망이 더 컸다.

파리 시민 10만명이 린드버그와 '세인트루이스 정신'을 에워쌌
다. 열광한 군중들은 린드버그를 1시간 동안 공중에 떠받들고 행
진했다. 대서양 양쪽 언론은 당시 26살의 린드버그를 현대판 콜럼
버스라고 불렀다. 뉴욕에서 열린 환영 퍼레이드에는 무려 4백만명
이 몰렸다. 린드버그를 찬양한 시 5,000여편, 노래 250여 곡이 쏟
아져 나왔다.

지난해 미국에서 나온 전기 '린드버그'의 저자 스코트 버그는
"린드버그야말로 최초의 현대적 미디어 스타"라고 했다. 그런데
전기 '린드버그'는 린드버그 부인을 비롯 주변 인물들 취재를 통
해 그가 유태인을 박해하는 나치를 지지했고, 인간적으로도 냉혈
한이었다고 폭로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화, 언론,
라디오,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유태인들은 우리 나라에 위험한 존
재"라며 "독일인들이 유태인을 탄압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단독 비행사답게 모든 것을 직접 챙겼다. 암으로 72세에
숨을 거두기 직전 장례식 절차를 일일이 지시했을 정도였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를 껴안고 싶었지만, 당신은 타인들이 자기 몸에
손대는 것을 싫어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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