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유하와 영화배우 심혜진이 만났다.

유하는 시집 '무림일기'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등을 펴낸 90년대 시의 대표 주자. 심혜진
은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으로 낭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
고, '결혼이야기' '은행나무침대' 등 숱한 히트작의 배우다. 언어
와 영상, 두 갈래 길을 따로 걷던두 사람이 만날 수 있었던 접점은
무엇일까.

유하가 시인일 뿐 아니라 90년대초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을
연출했던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문단에서 흔히 유하가 배우 니콜라
스 케이지와 닮았다고 해서? 심혜진이 유하 영화에 출연했었나? 아
니다.

심혜진은 유하의 시 '콜라 속의 연꽃, 심혜진논'(89년 발표)에
개런티도 받지 않고 출연한 적이 있다. '톡 쏘는 맛처럼 떠오르는
여자가 있다 코카콜라 씨/에프에서 팔꿈치로 남자를 때리며 앙증맞
게 웃는 여자, 그 몇 프/레임 안 되는 장면 하나가 방영되자 마자
연예가 일번지/압구정동 일대가 술렁였댄다 그것 땜에 애인 있는
남자들의 옆구리가/순식간에 멍들었다는데…'.


영상 세대의 언어감각으로 대중문화 시대의 풍속도를 풍자한 유

하 시의 한 단면이다. 그런데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유하를 만난

심혜진은 오래 전에 읽은 그 시를 떠올리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처음에 그 시를 읽고선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뭐랄까…칭찬을 하려면 더 솔직하게 할것이지…".

키가 190센티 미터에 가까운 거구의 유하는 얼굴을 휘청, 뒤로
젖히면서 그냥 웃기만 했다. 그는 산문 '콜라같은 여자, 숭늉같은
여자'로 심혜진 매력을 분석한 적이 있다.

"저는 한국 여배우를 심혜진 이전과 이후로 나눠요. 심혜진씨는
카메라 앞에서 감독 요구에 따르던 전통적인 내러티브(서술)형 배
우들과는 달라요. 난 느껴요라는 코카콜라 카피처럼 자연스럽게 감
각적인 연기를 해오고 있어요.".

전직(?) 영화감독의 칭찬을 들은 심혜진은 시집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를 펼쳤다. 유하가 최근 펴내 벌써 1만3000부
찍은 시집이다. 심혜진이 꺼낸 시집 여러 쪽이 접혀져 있다.

"제 마음에 든 시들은…"'그대 손길 닿는 곳엔/등불처럼 꽃이 피
어나고/메마른 날개의 새는 선인장의 푸른 피를 몰고 와/그대 앞에
달콤한 비그늘을 드리우리'('어느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내 안에도 미세한 떨림을 가진/미류나무 가지 하나 있어/어느
흐린 날, 그대 홀연히 앉았다 날아갔습니다/그대 앉았던 빈 자리/
이제 기다림도 슬픔도 없습니다'('그 빈 자리').

그녀는 고개를 들어 시인의 눈을 쳐다보면서 "누구에게나 말하
고 싶지 않은 빈 자리가 있지 않나요?"라고 했다. 순간 침묵. 시인
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약간 벌린 채 언어를 망각한 듯한 자
세를 취했다.

심혜진이 찰나의 침묵을 끊었다. "유행가를 들으면서 자기 얘기
라고 생각할 때가 있듯이, 시는 소설과 달리 자기 생활을 투영하면
서 읽을수 있잖아요. 유하씨 시에서 그대는 어머니일 수도 있고,혹
은 죽은 친구, 이룰 수 없는 사랑일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시는
편안한것이고, 편한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해요. 유하씨의 이번 시
집은 지난번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처럼 딱딱하지도 않고…그냥
편안하게 읽었어요. 사실 저는 시집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예요.학
교에서 시를 배울 때 이 시에서 '당신'은 무조건 조국이라는 식으
로 시를 분석하기만 해서 그런지 시는 어려운 것으로만 생각해왔어
요. 배우니까, 가장 많이 보는 책이 시나리오죠.".

대화는 시와 영화의 접속으로 나갔다. 먼저 유하가 말했다.

"배우와 시인의 공통점이라면, 배우는 몸짓 언어로, 시인은 활
자언어로 똑같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저는 영화를 보
다가 배우들 연기에서도 시상을 얻어요. 시인과 배우 둘 다 '쇼'의
인생을 사는 거예요. 보여주고 평가받고 기뻐하면서 절망도 하는
거죠. 허수경 시인이 썼던 '바다 탄광'이란 말을 빌리면, 바닷속처
럼 편안하지만 탄광 막장처럼 괴로운 양면성이 쇼의 인생인거죠."
"쇼의 인생…저도 동감이예요. 그래요 바다 탄광, 거기에는 희
망도 절망도 없어요…"
"그래도 배우들은 시인보다 편한 것 같아요. 몸으로 때우니까.

어쨌든 제인생의 좌우명은 'Show must go on(쇼는 계속돼야 한다)'
이예요.".

그때 심혜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때르릉이 아니라 주페의 '경기
병 서곡'이 힘차게 튀어나왔다. 말들이 달리는 형상이 절로 떠오르
는 곡이다. 그리고 보니 심혜진이 말띠 아닌가.

어쨌든, 유하 말대로, 쇼는 계속됐다.

"드라마 '수줍은 연인'에서 심혜진씨는 자기 감각에 충실한 여
자로 나왔죠. 남자 친구에게 자꾸만 거짓말을 하면서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여자, 남자 친구 입장에서 보면 요부같은 여자였지
요. 저는 심혜진이 아니면 누가 저런 요부역을 할 수 있을까 생각
했어요.".

두 사람은 이날 쇼의 제2부인 사진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응시
했다. 심혜진이 중얼거렸다.

"사진 찍히는 것이 가장 어려워요. 삶은 연속인데, 이렇게 정지
해 있으면 불안하거든요.".

두 사람은 사진 기자의 요청에 따라 카페 밖으로 나갔다. 걸으
면서 심혜진이 물었다.

"유하씬, 어디에 가고 싶으세요."
"언젠가 한번 갔던 지중해에 다시 가보고 싶어요. 이번 시집에
도 그리스의 섬에 갔던 이야기가 나오죠."
"그리스에 가면 서먹서먹한 사이도 연애하는 심정이 되고, 누구
나 연인이 된다죠.".

봄햇살을 맞으며 둘은 이야기를 나눴다. 등 뒤로 길게 늘어진
두 그림자의 입이 무성의 언어를 연신 주고 받았다. 쇼는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