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은 말을 타고 장가갈 수도 없고 가마타고 시집갈 수도 없었다. 대
신 신랑은 소를 타고 신부는 널판지를 타야 했다. 이름도 인의예지 같은
고상한 것을 넣어 지으면 안 됐고 장가가서 상투를, 시집가서 큰 머리를
얹어도 안됐다. 중세 창녀나 유태인 앞자락에 노란 천을 달아 식별했듯이
백정에게는 삼베오라기를 달고 다니게도 했다. 백정 아들이라 하여 찾아
가는 학교마다 거절당하자 분노한 진주 백정의 천년 한이 형평사를 낳았
다. (이규태·조선일보논설고문).


사진설명 :
1948년 4월 서울에서 열린 형평사 전국대회 모습.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령이다.…지금까지 백정은

어떠한 지위와 압박을 받아왔던가. 과거를 회상하면 종일토록 통곡하여도

혈루를 금할 길 없다.…조선민족 2천만의 분자로서 갑오년 6월부터 칙령

으로써 백정의 칭호가 없어지고 평민이 된 우리들이다.".

1923년 4월 25일 경남 진주에서 '형평사'가 발족했다. 역사상 한반도
에 남아 있던 마지막 신분 차별인 백정을 해방시키자는 기치였다. 오랜
세월 신분제의 질곡 속에 신음하던 백정조차도 억압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일에 나섰음을 말해주는 창립 취지문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백정은 조선시대에 도살과 육류 판매, 유기(고리버들로 만드는 용기)
제조 등에 종사하던 천민층으로 삼국통일 무렵부터 한반도에 흘러 들어온
유목민족의 후예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1894년 갑오경장의 신분제 철폐
에 따라 백정 역시 법제적으로는 해방됐지만 오랫동안 계속된 차별의식은
사라지지 않아 일반인과의 혼인은 물론 같은 마을에서 사는 것 조차 어려
웠다.

형평운동의 주도자는 진주 백정 이학찬이었다. 그는 상당한 재산을 갖
고 있었음에도 자녀들이 가는 학교 마다 퇴짜를 맞고, 간신히 입학한 학
교에서마저 심한 차별을 받자 참을 수가 없었다. 일본 명치대 출신의 장
지필은 총독부에 취직하려다 호적등본에 '도한'으로 기록된것을 보고는
형평운동에 뛰어들었다.

진주 청년회관에서 열린 창립총회에는 약 8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 중
에는 백정 출신 외에도 이들의 뜻에 공감한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등 평
민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진주의 형평사 창립은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전국 각지에서 하부
조직이 만들어졌으며 형평사는 1년 만에 12개 지사, 67개 분사를 가진 대
규모조직으로 발전했다. 또 형평청년회, 형평학우동맹, 형평여성동맹 등
부문별 조직도 만들어졌다. 여론도 호의적이었다. 조선일보는 5월 3일자
사설에서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시대에 적합한 행동이라 생각된다. 운
동의 철저한 노력을 백정 동포에게 원하며…"라고 명백한 지지 입장을 밝
혔다.

그러나 오랜 관습을 뒤집으려는 시도에는 반발도 있게 마련이었다.5월
24일 진주에서는 농민 2000여명이 모여 형평사의 해산을 요구하며 백정들
이 판매하는 고기의 불매-불식 운동을 결의하는 등 도처에서 반형평운동
이 벌어졌다. 곳에 따라서는 이들과 형평운동 단체 간에 마찰과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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