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워털루 전쟁(1815년)은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전이
었다.

그것은 또 기업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최대 금융
가였던 로스차일드는 남보다 빨리 한시라도 빨리 결전 결과를 영국에
전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미리 역마를 도처에 배치하여 밤을 새고 메
신저가 영국에 전황을 날랐다. 그러나 도버해협은 아무리 메신저가 묘
안을 짜도 배를 타고 건널수 밖에 없었다.


사진설명 :
당시 과학자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대서양 횡단 무선전신에 성공한
마르코니가 전신기옆에 앉아있다.

그런 안타까움을 풀어준 것이 마르코니였다. 1901년 그는 처음으로

영국에서 보낸 신호를 대서양 건너 캐나다 부근에서 수신하는 데 성공

했다. (홍사중·조선일보 논설고문).

1896년 영국 세관 관리들은 남루한 행색의 이탈리아인과 말타툼을
벌였다. "폭탄 아닙니까?" 관리들은 이 젊은이가 갖고 있던 이상하게
생긴 전기장치를 부숴버리고 말았다. 그 물건은 무선전신기였다. 당시
22살의 이탈리아인 발명가 귈레모 마르코니(1874∼1937)가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연구지원을 거절당하자 영국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입국하려던 참이었다.

그로부터 5년뒤인 1901년 12월12일. 캐나다 뉴 펀들랜드 부근. 마
르코니는 스스로 고안한 무선 수신기 앞에서 초조하게 '신호'를 기다
리고 있었다.

약속된 영국 그리니치 표준기각 정오. 숨막히는 긴장이 흐르는 가
운데 기계에 반응이 왔다. "톡톡톡." 수초도 걸리지 않은 짤막한 신
호. 2∼3m 떨어진 곳에서라면 들리지 않았을 작은 소리였지만 마르코
니에겐 지축을 흔드는굉음으로 들렸다. 그곳에서 1,600마일 떨어진 대
서양건너 영국에서 보낸 전파였기 때문이었다.

이날 마르코니가 수신한 전파는 모르스 부로호 S자. 역사상 최초로
수천마일 떨어진 곳에 선 없이 신호를 보낼 수 있게 되면서 물리적인
'거리'가 그 의미를 상실하게된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무선시대는 사실 모르스에 의해 열렸다. 그러나 그래함 벨이 전화
를 발명하면서 유선전신은 급속하게 무선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렇지
만 무선이 아니면 안되는 곳이 딱 한곳 있었다. 항해중인 선박과 선박
간 통신이었다.

마르코니는 바로 이 점에 착안했다. 요즈음으로 따지면 틈새시장
공략이었다. 실제로 마르코니는 자신의 발명품을 영국 해군에 팔았다.

마르코니가 무선전신 대서양횡단에 성공한 날, 라이벌이었던 해저
전선회사는 분해서 이를 갈았다. 이렇듯 무선과 유선의 싸움으로 시작
된 20세기 통신전쟁은 지금도 통신위성이냐 광섬유냐를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

무선통신의 효용성은 선박구조에서 탁월하게 드러났다. 1912년 타
이타닉호 침몰을 사람들은 '대재앙'으로만 기억하고 있지만 해난사고
구조사에도 남을만한 사건이었다. 당시 승객 711명이 구조됐는 데 이
건 순전히 무선으로 구조요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뉴욕타임즈
가 그날 신문 역사에 남을만한 완벽한 지면을 만들 수 있었던 것 역시
무선전신 덕분이었다.

1937년 마르코니가 세상을 떠났을때 전세계 방송사들은 이례적으로
2분동안 침묵을 지켰다. 무선전신과 3극진공관이 결합된 라디오 대중
화로 세상이 온통 전파잡음으로 뒤덮여 있었던 시대였다. '전파의 아
버지'에 대한 최대 추모였다.

한국에서는 1902년 처음으로 공중용 시외전화가 설치됐다. 전화가
입자 24명 가운데 조선인은 2명에 불과했다. 점잖은 처지에 어떻게 전
화통을 들고 남과 대화할수 있으며, 어른을 전화통으로 불러 얘기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