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새내기들은 솔직하고 당당했다. 99년을 누구보다 가슴 벅차게
맞은 일간지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자들 중 조선일보의 나유진(35),
동아일보의 윤성희(27), 중앙일보의 이혜진(24)씨를 초청해 1월2일 조
선일보사 문화부에서 가진 좌담회. 희망에 부푼 목소리를 듣고싶던 기
대는 초반부터 깨졌다. 소감부터가 달랐다.


사진설명 :
"우리는 문단 동기생"이라며 상견례하는 주요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 당선자들.
오른쪽부터 나유진(조선일보), 윤성희(동아일보), 이혜진(중앙일보)씨.


"너무 빨리 된 것 같아서 황당해요."(나유진)

"무섭죠. 감당해야 할게 많아지는 게."(윤성희)

"통보를 받은 직후 30분쯤 즐거웠고 그 뒤로 줄곧 기분이 무거워요."

(이혜진).

의례적 겸사가 아니었다. 문학 수련의 목표가 되었을 '목표 지점'
하나가 사라져 버린 것을 정말로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당선작들은 약속이나 한 듯 어두운 색채 일색이다. 나씨의 '다비식'
에선 자식 하나 못 둔채 소실 자식들을 키우며 한많은 인생을 살아온
90살 노파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윤씨의 '레고로 만든 집'은 지진
아인 오빠, 파산끝에 칩거하는 아버지를 부양하는 여성의 희망없는 삶
을 그린다. 이씨의 '소인국'은 남편이 죽은 뒤 대상없는 분노로 탐식
증에 걸린 중년여성과, 거식증에 걸린 딸을 대비시키며 삶의 기괴함을
드러낸다. 어느 심사위원은 "IMF시대가 소설을 그렇게 만든것 아닌가"
했으나 당사자들 목소리는 조금 달랐다. "글쓰기란 헤엄치는 백조의
멋진 겉모습 대신 수면 아래서 힘겹게 움직이는 발에 주목하려는 태도
이며 예술적 광기란 본래 고통스런 지점에서 발로되는 것"이라는 나씨
의 말에 다른 당선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21세기 한국 문단의 주역을 꿈꾸는 올해 당선자들의 이력과 풍모는
전통적 문학 지망생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나씨는 미국 LA에서 가족과 7년째 살며 한인 TV방송국 컴퓨터 그래
픽 담당자로 일하고 있는 주부. 한국의 '90년대 신세대 소설'들이 도
시적 감수성과 개인주의, 비현실에 대한 탐구등으로 특징지워진다면,
나씨작품은 반대편에 있다. 나씨는 "외국에 살다보니 한국적인 것들에
관한 기억은 더 큰 그리움으로 내 안에 남아있다. 평온했던 내 고향
(전북 부안)에 관한 꿈이 소설에 묻어 있다"고 했다. 그의 토속어 구
사 솜씨는 잠시 잊고 있던 60년대 단편 문학의 향기를 추억하게 한다.

20대인 윤씨와 이씨에게선 신세대 여성의 체취가 물씬하다. 윤씨는
비디오 게임을 너무 좋아해 한때 게임 시나리오 작가를 지망했으며 톨
킨의 판타지 소설 '반지전쟁'에 매료됐던 '사이버 세대'다. "당선작
내용중 여주인공이 자신의 얼굴을 복사하는 대목 등에 세기말적 절망
이 드러났다는 심사평이 있었다"고 하자 그는 "호호" 웃었다. "아유,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다만 세상이 다 무너질듯한 절망에서도
사람을 살아남게할 희망은 어떤것인가를 생각하고 썼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가장 파격적인 쪽은 이혜진씨. 그는 소녀시절 문학이 아니라 서태
지에 빠졌었다. 서태지를 보려고 집(충북 제천)에서 새벽 기차로 상경
했을 정도였다. 고교 시절 서태지 소재 장편소설을 한편 써서 '교내
회람 베스트셀러'가 됐던 것이 글쓰기 출발이었다. 지금도 그는 "하루
한번은 꼭 PC통신을 접속해 파란 모니터 화면과 대화를 나눠야만 안
심이 된다"며 스스로 '통신중독증 환자'라고 했다. 그는 "음식먹기나
요리를 너무 싫어하는 편이어서,만일 내가 식욕많은 사람과 함께 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생각하며 썼다"고 말했다.

문단 새별들은 오늘의 한국 소설 흐름에 관한 생각을 묻자 기다렸
다는 듯 매서운 비판들을 시작했다.

"젊은 인기 작가들이 공부는 안하고 경험에만 기초해서 감각만으로
버티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나마 은희경씨처럼 입담이라도 세면, 표
현을 읽는 맛이라도 있는데 대부분 2권 이상만 읽으면 똑같은 이야기
인게 드러나니 식상하게 되더라고요."(나유진).

"어떤 여성작가 작품을 읽다보니 이젠 그 작가 집안 어느 구석에
무슨 물건이 있는 것까지 외우게 되더군요."(윤성희).

"대학때 소설들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어둡게만 쓰는 것인지 화가
났어요. 조그만 데서도 사람은 행복을 얻을 수 있는데 소설가들이 죽
는 소리들만 해대나 하는 생각이었죠. 좀 무례한 말씀인지 모르지만
그래서 '내가 소설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죠.(웃음)"(이혜진).

80년대를 휩쓴 현실참여적 소설의 전통에도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94학번'인 이씨는 한때 젊은층을 열광시켰던 한국 근대사를 다룬
대하소설들에 대해서도 "제 친구들은 광고가 그토록 나오지 않았다면
거의 안 읽었을 것"이라며 "읽고 나서도 큰 감동을 받았다는 친구는
별로 못 봤다"고 했다.

인기 작가 소설의 가벼움이나 사회참여 소설의 무거움을 모두 싫어
한다는 이들은 어떤 작가의 길을 가겠다는 것일까.

"10년에 한 편을 쓰더라도 늘 공부하면서,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
개인적으로는 어른을 위한 동화같은 소설을 쓰고 싶어요."(나유진).

"기본적으로 행복한 소설, 즉 제가 쓰면서 행복하고 읽는 사람도
행복한 그런 소설이 제 소망이죠."(윤성희).

"소설의 격을 낮출 생각은 전혀 없지만 심각한 문학만이 문학이라
는 생각에서도 벗어나고 싶어요. 한국 여성작가 소설은 재미 없다면서
도 무라카미 하루키에 열광하는 제 여동생, 추리소설-애정소설만 읽는
제 친구들에게도 읽힐수 있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어요."(이혜진).

21세기 다매체 시대에 소설이 위기를 맞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대
해서도 그들은 생각이 달랐다. 나씨는 소설의 미래가 화제에 오르자
가방에서 조각보를 이어만든 '퀼트' 손가방을 꺼냈다.

"저는 이 퀼트를 하면서 전혀 예상못했던 즐거움 하나를 발견했어
요. 한땀 한땀 천조각을 바느질 하면 마음속 격정은 가라앉고 가슴
속이 평온해지죠. 어쩌면 미래의 문학이란 정신없이 핑핑 돌아가는
세상에서 인간의 마음을 다스려주는 예술로 끝까지 생명력을 가지지
않을까요. 마치 밀란 쿤데라 소설 '느림'에서 너무 빨라져 가는 세상
이 오히려 '느린 것'에 대해 그리움을 갖게 만들듯이.".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이렇게 어떤 권위나 관습에서도 얽매이지 않
으려는 자유로운 몸가짐으로 새로운 세상,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찾고 있었다. (* 김명환기자·mhkim@chosun 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