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준 용-------------.
Y씨/친구/애인/노인/남자/경찰관/파출소장/여종업원/야바위꾼
(친구와 야바위꾼, 애인과 여종업원은 일인 이역이 가능하다).
1. 자료화면
겨울, 밤 사이 폭설이 내려 노면이 얼어붙은 출근길 교통 상황. 서
울 시내주요 도로마다 자동차들이 꼬리를 길게 물고 서 있다. 각 도로
의 교통 상황과 안전 운전에 대한 아나운서의 멘트가 흐른다.
야바위꾼(소리)=자, 아무나 와요. 아무나 와서 도전해 봐요. 언니,
오빠, 누나, 형님,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
버지, 아무나 와서 행운을 잡아봐요. 건 돈의 따
따블. 만원 걸면 사만원. 십만원 걸면 사십만원.
많이 걸면 많이 따고, 가는 길만 알면 누가 와서
해도 이기는 게임. 기회는 지금. 잡는 게 돈 버는
길. 자, 그럼 시작할까요. 다섯수. 다섯 수만에
못 이기면 꽝.
2. 공원
Y씨, 벤치에 앉아 노트에 무언가 쓰고 있다
Y씨가 있는 그 반대편에선 남자가 야바위꾼과 장기 두고 있다
노인, 그 옆에서 구경하고 있다.
Y씨, 남자와 야바위꾼이 장기 두고있는 곳엔 관심도 없다
Y씨의 모습은 결코 무료해 보이지 않으며 매우 진지하다.
남자 =장이야!
야바위꾼=아따, 이 아저씨 첫 수부터 폼새가.... 자, 그럼 난 이렇
게 멍이야!
남자 =또, 장!
야바위꾼=이번엔…… 이렇게 막고. 세 수 남았수.
노인 =(야바위꾼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저 차로 가서 장
불러
야바위꾼=(노인을 바라보지 않고. 그러나 무섭게) 영감, 입 조심하
는 게좋을 거 같은데!
노인 =(남자의 뒤로 슬쩍 숨는다)
야바위꾼=한 번만 더 훈수뒀단 알아서 해!
남자 =나도 그렇게 하려고 했으니까 영감 탓 말고, (득의 양양하게)
장이야!
야바위꾼=저 놈의 영감 때문에! (고민 끝에) 멍이야. 두 수 남았수.
노인 =(귀속말 하듯) 그럼 이번엔 포를 뒤로 넘겨. 가는 길이 뻔하
잖아
야바위꾼=그 놈의 영감 입조심 하라고 했더니. 까짓 거 맘대로 해 봐!
(Y씨의 시선이 처음으로 이들이 있는 곳을 향한다)
남자 =포를 넘겨? 그럼 사로 막으면 그만이고…… 좀전에 차로 가
서장 부르는 게 아니었는데. (노인을 때릴 듯이 노려보며)
이영감탱이를!
노인 =(뒤로 주춤 물러서며) 어차피 자네가 이길 수 없는 장기같
은데 뭘.
남자 =뭐야! 이런 빌어먹을 인간을! (하며 노인을 힘껏 밀친다)
(노인, 바닥에 나 뒹군다)
남자 =그럼 나 돈 잃으라고 일부러 그랬단 말야?
노인 =아냐. 내가 자네,
남자 =아니긴 뭐가 아니라고 그 주둥아릴 또 놀려! 남의 돈이나
훔쳐사는 주제에! (하며 쓰러진 노인을 발로 걷어찬다)
노인 =알았어. 때리지 마. 갈께. 내가 잘못했어. 아이고, 나 죽네
야바위꾼=영감은 맞아도 싸. 가만히 있으면 매는 안 맞지
남자 =다시 내 눈앞에 보였단 그때가 초상날 되는 줄 알고, 꺼져!.
(노인, 간신히 일어나 Y씨 곁으로 온다)
(Y씨, 노인을 바라본다)
노인 =(궁시렁거린다) 저 산적같은 놈은 사람도 아냐! 아이고, 허
리야! 이러다 내가 내 명에 못 죽지. 아이고, 허리야!
남자 =나 안해. 돈 돌려 줘
야바위꾼=뭐야?
남자 =누가 붙어도 못 이기게 해 놓고, 이건 사기야. 그러니까 안
한다고!
야바위꾼=너 그래서 일부러 저 영감 패면서 힘자랑 했어?나 겁주려고?
남자 =어쨌든 난 더 이상 못 해. 내 돈 돌려줘.
야바위꾼=이 자식이 빰 맞을 소리하고 있네. 뭐야 이 새끼야!
남자 =(기세에 눌려) 이런 수가 있는 줄 모르고……. 돈 돌려줘요
야바위꾼=남자 자식이 잃었으면 그걸로 끝이지 자존심도 없이! 아직
두수 남았으니까 성질 돋구지 말고 마저 두고 꺼져
남자 =나 그 돈 없으면 안돼요.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야바위꾼=그건 내가 알바 아니고
남자 =제발, 돌려줘요. 나 그 돈 없으면 오갈데도 없어요. 굶어 죽
어요
야바위꾼=그런 돈이면 하질 말았어야지 누가 널더러 잃으래?
남자 =그럼 반만이라도……
야바위꾼=병신같은 자식, 재수가 없으려니까! 꺼져 이 자식아, 얻어
맞기전에!.
(Y씨, 벌떡 일어나 남자에게로 간다)
(남자, 야바위꾼에게 돈 돌려달라며 통 사정 한다)
노인 =(Y씨가 수첩에 쓰다만 메모를 슬쩍 집어들고 띄엄띄엄 읽는
다)무슨 희망이 있을까. 스스로를 지킬 자부심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지쳐있다. 가진 자들에게 바람에 이는 먼지만큼
의 동정과 통제를 바라며, 죽어간다. 그래도 저들에게 필요
한것은, 자유다. 사랑이다.
(Y씨, 남자를 향해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대로 주먹을 날린다)
(남자, Y씨의 주먹에 그다지 충격을 받지않은 듯 어이없다는 표정
으로 Y씨를 바라본다. 어이가 없긴 야바위꾼도 마찬가지다)
(노인, 메모의 내용을 모두 읽고 고개를 갸우뚱 Y씨를 바라본다)
(조명 서서히 어두워 진다)
(Y씨, 거의 어둠속에서 남자를 향해 다시 주먹을 날리려고 하는데
조명이 파출소로 바뀐다).
3. 파출소
파출소장, 전화하고 있다.
파출소장=물이 너무 깨끗하면 고기가 살 수 없는 법이지. 사람 사는
세상도 그래. 뭐, 부정 부패를 없애? 말이야 좋지. 그런데 솔
직히 그게 없으면 어떻게 살아? 음식에도 적당히 양념이 들어
가야 제 맛이 나는 법인데. (사이) 그렇지, 그렇다니까. 이 삭
막한 세상 어떻게 법대로, 원칙대로 살아. 그럼 아마 사람 구
경하려면 동물원 가듯 유치장으로 가야하고. 생각만 해도 끔찍
한 일이지. (사이) 김사장은 좀 어때? 사업말야. (사이) 엄살
은! 나 김사장한테 요즘 섭섭한게 한 두 가지가 아냐. 소식도
뜸하고 말야. 이제 나같은 사람 무시하고 살아도 좋다 이건데!
(사이) 내일? 갑자기 그렇게 나오니까. 그런데 김사장 오해하
는건 아닌지 모르겠네. 내가 무슨 대접을 못받아서 아까 그런
말했다고……. (사이) (웃음) 하하하하하! 못 풀었던 회포도
풀고, 서로 정을 나누며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란 걸 느끼고 싶
어?(웃음) 하하하하하! 역시 김사장은 달라. 이래서 내가 김사
장을 좋아할 수 밖에 없다니까. (웃음) 하하하하하!.
남자(소리)=내 발로 가면 될거 아냐. 이 것좀 놓고 얘기하자고요
경찰관(소리)=이 사람이 정말! 빨리 들어와!.
(남자, 경찰관에게 이끌려 함께 등장한다)
남자 =정말 나 죄 없다니까요! 나도 피해자라고요, 피해자!
(입술 까 보이며) 봐요, 여기 다 찢어졌잖아요. 피 나는거
안 보여요!
파출소장=그럼 내일 봅시다. 시간맞춰 갈테니까. (전화 끊는다)
경찰관 =알았으니까 저기 가서 앉아요.
남자 =(의자에 앉으며) 나 참 재수가 없으려니 오늘 운세 드럽게
꼬이네
경찰관 =(밖을 향해) 아저씬 안 들어오고 뭐 해요! 들어와요.
(Y씨, 등장한다. 얻어맞은 흔적이 몸 전체에 확연히 드러나 있다)
남자 =저 말라 비틀어진 북어같은 자식이! 야, 이 자식아! 죽고싶
어 환장을 했으면 한강에나 뛰어들 일이지 왜 나한테 와서
지랄이야. 너 나 알아? 나도 너 몰라!
파출소장=시끄러워. 좀 조용히 해요, 조용히.
남자 =왜 나만 갖고 그래요. 나 잘못한 거 없다니까요
파출소장=그건 우리가 따져줄테니까 조용히! 여기가 무슨 시장 바닥
인줄알아!
남자 =(머리 신경질적으로 긁적이며) 정말 사람 미치겠네!
(Y씨, 그저 우두커니 서 있다)
파출소장=(Y씨를 힐끔 쳐다보며 경찰관에게) 무슨 일이야?
경찰관 =이 친구가 완전히 북 치듯이 깔고 앉아 저 지경을 만들어 놨
드라고요.
파출소장=이 공원에선 못 보던 사람인데, 다른 데서 왔나? 딱 보니까
홈리슨데?
경찰관 =글쎄요. 뭘 물어봐도 아무 말도 하질 않고
파출소장=(Y씨를 손짓으로 부르며) 어휴, 얼굴 꼴이 그게 뭐야. 자,
이리와서 앉아요. 지금 때가 어느땐데 다 큰 사람들이 창피한
지도 모르고말야.
(Y씨, 파출소장 앞에 앉는다)
파출소장=(Y씨에게 휴지 주며) 보기 흉하니까 피나 좀 닦고. 아직도
피가나네. 거기 코하고 입 언저리
Y씨 =(휴지 받아 옷에 묻은 피부터 닦는다)
파출소장=이 사람이 참! 얼굴부터 닦으라니까. 바닥에 피 떨어져요
(Y씨, 여전히 옷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있다)
(보고있던 파출소장, Y씨에게 휴지 몇 장을 더 준다))
(Y씨, 휴지 받아 옷과 얼굴의 피를 닦는다)
파출소장=됐어. 나중에 물로 닦고, 집이 어디에요?
Y씨 =(하던 행동을 계속할 뿐) ……..
파출소장=집! 집, 없어요?
남자 =소장님, 저 말 좀 해도 돼요?
파출소장=여태 당신만 떠들었는데 또 무슨 말을? 당신, 폭행죄야. 폭
행죄는 강력사건이고. 알아, 몰라?
남자 =알아요
파출소장=알고서도 그랬단 말야?
남자 =그러니까 제 말 좀 들어보시라니까요
파출소장=그럼 요점만 간단히 해 봐.
남자 =전 정말 억울해요. 글쎄 제가 장기두고 있는데 갑자기 이
자식이 어디서 기어나왔는지 모르게 와서는 주먹부터 날리
더라고요. (입술 까보이며)여기요. 나 참 어이가없어서.근
데 이 자식이 또 주먹질을 하려고 그래서…저 자식이 대낮
부턴 술쳐먹고 꼬장을 부린거라고요
경찰관 =어찌됐건 당신이 사람 두들겨 패서 저렇게 만들어놨잖아!
남자 =그럼 아무나 이유도 없이 먼저 와서 때리면 맞고만 있으란
얘기에요! 그게 우리나라 법이에요? 병신처럼 때리면 때리
는대로 맞고 살라고?
파출소장=(Y씨에게) 술 먹었어요?
Y씨 =…….
파출소장=주민등록증 있죠? 줘 봐요
Y씨 =(주민등록증 꺼내준다)
파출소장=본적도 서울. 주소도 서울. 오리지날 특별시민이네. 그럼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지, 이게 뭐야?
Y씨 =물 좀 주세요
파출소장=아휴, 술 냄새. 언제부터 마셨길래 여태!
Y씨 =물 좀 주세요
파출소장=일어나서 잠깐만 걸어봐요. 여기서 여기까지 몇발짝만!
(Y씨, 일어나서 걷는다. 비틀거린다)
남자 =낮술에 취하면 지 애비, 에미도 몰라본다고. 옛날 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니까요
파출소장=자, 됐으니까 앉아요.
(Y씨, 앉는다)
(파출소장, 물 따라 준다)
(Y씨, 받아 마신다)
파출소장=당신이 먼저 저 사람 때렸어요?
Y씨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 =거 봐요. 그렇다니까요. 그래도 저 자식이 양심은 있는 놈
이었네
파출소장=(혼잣말로) 한심한 자식들!
경찰관 =예?
파출소장=(귀속말 하듯) 두 놈 다 행색도 그렇고, 그냥 내 보내지.
경찰관 =그래도 주민들 신고가 들어와서 나갔던 일이라……
파출소장=좋은 게 좋은거라고, (남자를 가르키며) 저 놈 조서꾸며
넘겨봤자 합의해 줄 돈이나 있겠어. 인생만 불쌍해지지
(Y씨를 가리키며) 저 정도로 안 죽어. 술 처먹고, 얻어맞고,
그게 일상인놈 같은데 뭘. 내 보내. 이거야 원 하루라도 저
런 놈들 안 보고 넘어가는 날이 없으니!
경찰관 =(Y씨에게) 아저씨가 저 사람 먼저 때렸다고 했죠?
Y씨 =(고개를 끄덕인다)
경찰관 =왜 그랬어요?
Y씨 =가엾어서
경찰관 =뭐요?
Y씨 =저 사람이 가엾어서
남자 =저 자식이 뭐, 가여워? 사돈 남 말하고 자빠졌네
경찰관 =(피식 웃으며 파출소장을 바라본다)
파출소장=(재미있다는 듯 경찰관에게) 계속해 봐.
경찰관 =(조롱하듯) 그럼 아저씨가 잘못했네. 가엾은 사람을 왜 때
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Y씨 =재밌나요?
경찰관 =(여전히 조롱하 듯) 아니, 하나도! 조서 꾸며야 되니까 묻
는거잖아요
Y씨 =조서를 꾸미면?
경찰관 =고발해야죠
남자 =누굴 고발해요? 난 아무 잘못도 없다니까!
파출소장=(남자에게 조용히 하라는 동작을 보이며) 알았어. 알았으
니까, 알았지?
Y씨 =고발을 하면요?
경찰관 =법대로 처벌받는거죠. 이 사람은 졸지에 폭력 전과자 되는
거고.
Y씨 =원치 않는다면요?
경찰관 =좀 억울한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종결. 끝! 서로 좋은
게 좋잖아요
Y씨 =(웃는다. 하지만 슬퍼 보인다)
경찰관 =……???
Y씨 =내가 원하면 처벌을 받고, 원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했건
상관없다?
경찰관 =당연하죠
Y씨 =누굴 위해서?
경찰관 =위하긴 누굴 위해요! 민주주의 법치 국가니까 그렇지
Y씨 =법?
경찰관 =법!
Y씨 =무슨 법이요?
경찰관 =법은 무슨 법! 법이 법이지! (남자를 가르키며) 저 사람도
아까 그러잖아요. 우리나라 법이 어쩌고 저쩌고. 법, 몰라요?
Y씨 =누구 만든 법이요?
경찰관 =이 사람이 지금 장난치나! 무슨 법이든, 누가 만들었든 당
신이 알아 어쩌려고?.
Y씨 =(사이) 소년이 살았어요. 그 소년의 피부는 우유 같았어요
경찰관 =(어이없는 표정으로) 뭐야?
Y씨 =내가 손을 대면 내 손이 온통 우유빛으로 물들 것 같이. 난
그 소년의 살갖을 만지고 싶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그 소년
의 얼굴을 만질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난 그 소년의 얼굴
을 만진다는 게 그만 있는 힘껏 뺨을 내리치게 되었어요. 나
도 왜 그랬는지 몰라요. 어쩌면 그것이 애증일지도 몰랐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을뿐. 그 후 소년은 날 만나주지
않았어요. 나도 그 소년을 볼 수 없었어요. 정말 내가 소년
에게 하고싶은 말은, 그 마음은 전해보지도 못하고. 하지만
그마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왜 그랬는지 그 동기가 무
슨 소용이 있겠어요. 내가 왜 저 사람을 때렸는지 처럼, 이
미 일은 끝나 버렸는데
경찰관 =아휴, 머리 아파! 그러니까 요점이 뭐요? 고발 해, 안 해요?
Y씨 =(쓴 웃음) 법. 당신들의 편리한 논리. 오직 둘 중의 하나.
남자 =저거 미친놈 아니에요?
파출소장=가엾은 당신은 가만히 있고!
남자 =왜 소장님까지 그래요! 아휴, 저 미친놈 때문에 사서 고생하
게 생겼네!
파출소장=그래, 이 사람 당신 말대로 가엾다 치고 끝내지. 엄밀히 따
지면 이건 당신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볼 수 있는 일이라
고. 그렇죠?
Y씨 =이미 당신은 판단이 서 있는데 내 대답이 뭐가 그리 중요해
요? 그저 당신의 판단에 맞춘 맞장구가 필요,
파출소장=(말 끊으며) 이런 말버릇하곤! 누가 니 당신이야! 좋게 해
서 내 보내주면 고마운 줄이나 알아야지 건방지게시리! 그럼
원칙대로 해 줘?
남자 =소장님, 잘못했어요. 봐 주세요. 저도 저 사람 처벌받는거 원
치 않아요.(Y씨에게) 그치? 야, 그렇다고 해 이 자식아, 빨리!
Y씨 =난 저 사람이 처벌받는걸 원하지 않아. 고발할 생각도 없고
파출소장=그럼 처음부터 그럴 일이지, 왜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해?
우리가 우습게 보여?
Y씨 =내가 당신을 우습게 보았다면, 그건 당신들이 먼저 나와 저
사람을 그렇게 대하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내릴 판단의 선
택권 조차 저 가엾은 사람에겐 힘으로, 내겐 조롱으로 빼앗아
버리고
경찰관 =소장님, 어떡할까요? 넘겨요?
남자 =소장님, 잘못했어요.
파출소장=(겁을 준 것뿐이니 적당히 해서 내 보내라는 눈짓)
경찰관 =마지막으로 묻는거니까 분명히 얘기해요! 처벌 원해요, 원하
지 않아요?
Y씨 =원하지 않아요
경찰관 =(백지 한 장을 주며) 그럼 쓰고 나가세요. 맨 위에 먼저 진
술서라고 쓰고, 그 밑에 이름하고 주민증록 번호도 쓰고,상
기인은 X월 X일 X시XX 공원에서 XXX와 사소한 시비 끝에 서
로 쌍방에 상해를 입혔으나 이후 그 이의를 제시하지 않기
로 서약합니다. 그리고 당신 이름 한번 더 쓰고 지장 찍고.
(Y씨, 백지를 받아드는 순간 Y씨만을 남겨놓고 조명 사라진다)
남자(소리)=그럼 저 나가도 돼요?
파출소장(소리)=가 봐!
남자(소리)=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파출소장(소리)=요즘 아무리 경기가 안 좋기로서니 젊은 놈들이 살
아볼려고 하는 의지가 있어야지, 꼴같잖은 놈들! 저런 놈
들이 세상을 좀 먹고 있으니 나라가 빚을 지고, 이 지경
이 됐지!.
(Y씨, 책상에 포개어 놓은 팔 위로 얼굴을 묻는다)
Y씨(소리) =평행선. 나란히 마주보고 지나쳐 가며 서로에겐 아무런
관계도 맺어지지 않길 바라지만…… 거리의 보도블럭,
그 평행선 위를 오늘도 우리가 걸어가고 있다.
4. 꿈
책상위에 Y씨가 쓴 원고들이 쌓여있다
애인, 등장한다
Y씨, 애인을 보고 씨익 웃어 보인다.
애인 =뭐 하고 있었어?
Y씨 =널 기다렸어
애인 =(책상 위에서 원고를 집어 본다) 도대체 언제까지?
Y씨 =왜? 맘에 안 들어?
애인 =(건성으로 읽어보고 책상위에 버리듯 내 던진다) 사람들은
이런 글안 읽어. 언제까지 혼자만의 자위행위로 만족하며
살거야?
Y씨 =글을 쓰고있을 때가 제일 행복해
애인 =이따위 글들은 쓰레기로 버려질 뿐인데?
Y씨 =버려도 내가 버려
애인 =버림을 당하기 전에?
Y씨 =(애인을 바라보며 씨익 웃는다).
애인 =왜 수정해서 다시 보내지 않았어? 좋은 기회였잖아
Y씨 =니가 쓸데없는 짓을 했어.
애인 =출판사에서 요구했던 일들이 무리는 아냐. 얼마든지 그렇게,
Y씨 =(말 끊으며) 이제 그런 일 하고다니지 마. 니가 그들하게 구
걸하 듯고개 숙이고 다니는 일, 싫어
애인 =당신 선배가 도와주겠대. 당신의 능력을 사고싶대
Y씨 =난 그들이 원하는 글을 대신 써 주는 기계가 아냐. 난 돈을
벌기위해 글을 쓰진 않아
애인 =그럼 어떻게 살아? 밥은 어떻게 먹고, 집세는 어떻게 내고,
당신이 밥보다 좋아하는 술은 어떻게 먹어?
Y씨 =아직까진! 그 다음은 그 때가서.
애인 =이제 더 이상은 자신을 학대하고 고통받게 하지마. 당신은 충
분히 아파했고, 열심히 했어. 인정해. 그러니 이젠 새롭게 시
작해. 처음부터 완벽해질 수 없는 시작. 그 첫 발자국을,
Y씨 =(말 끊으며) 그래서 더 안돼. 성급하게 굴지마
애인 =도대체 당신이란 사람을 모르겠어. 뭘 원해? 정말 당신이 원
하는 게 뭐야?
Y씨 =나를 속이지 않는 명예
애인 =욕심이 없는거야? 아니면,
Y씨 =(말 끊으며) 그리고, 너!
애인 =나? (지겹다는 표정) 난 당신의 책상 서랍속에 들어있는 인형
이 아냐. 당신이 꺼내보면 늘 웃고만 있어야 하는 인형이!
Y씨 =널 사랑해
애인 =날 당신의 사람으로 갖고 싶어?
Y씨 =널 가질 순 없어. 아무도. 사랑해
애인 =당신이 글을 대하는 것처럼, 집착은 아니고?
Y씨 =(절망스러운 표정) …….
애인 =왜 말을 못해?
Y씨 =너, 그동안 네게서 도망칠 궁리를 했구나
애인 =날 정말 사랑해?
Y씨 =난, 널 사랑하는 것밖엔…… 똑같은 말과, 똑같은 행동을 다른
사람에겐 하지 않을거야. 할 수 없어
애인 =내가 당신 곁을 떠난다면 그 땐?
Y씨 =난 힘이 들거야. 널 기억속에서만 만나야 할테니까
애인 =그럼 날 잡아줘. 내가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게,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늦지 않았어
Y씨 =그게 무슨 위로를 줘? 당장의 편안함? 풍요로움? 그건 허상일
뿐이야
애인 =그래도 좋아. 안돼?
Y씨 =사람들은 왜 지쳐갈까! 사람들은 왜 삶이 지겹다고 말할까! 거
리를 떠도는 집시처럼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지만, 결국엔. 마음
이 죽어서 그래. 너도 날 사랑하잖아. 우리 그것만으로 만족하
며 살자
애인 =아니! 사랑만으론 살 수 없어.
Y씨 =마음이 죽은 게 부끄러워 그래. 그래서 그렇게 속이려하고 있
을 뿐이야. 사랑은 전부야
애인 =돈이 필요해. 남들에게 무시받지 않을만큼의 지위도 필요해.허
세를 부리며 살고 싶다는 게 아냐. 그냥, 살기 위해선!
Y씨 =이대로가 좋아. 지금 가진 것 만으로
애인 =뭘 갖고?
Y씨 =사랑! 그 마음을 당장 먹고 입는 것이 편해질 돈 몇 푼에 바꾸
려하지마
애인 =난 여자야. 갖고 싶은 게 많아. 욕심도 많아. 그런 날 위해 뭘
해줄 수 있어? 내가 원하면 무엇이든 사줄 수 있어? 내가 갖고
싶어하는 것들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Y씨 =돈을 모을께. 당장은 못 해 줘도 니가 원하는 거였다면, 언젠
가는 꼭!
애인 =내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그런 생활을 하고 싶다면? 정원이
넓은 그림 같은 집에, 좋은 차에, 가고싶을 때 아무때나 여행도
가고, 태어날 아이들에게 부족한 것 없이 모두 해 주고싶은 엄
마가 되고 싶다면?
Y씨 =난 우리 어머니가 고기를 싫어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안 드시
는거라고. 하지만 아니었어. 당신 입으로 들어갈 몫이 없다는
걸아셨던거지. 어머니의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었을까? 어머닌
불행한 여자였을까? 내 곁을 떠나지 마. 내일부터 막노동이라도
할께. 어떤 험한 일이라도 일자리를 찾아볼께.
애인 =그러려고 여태 공부하고, 책 속에 묻혀 살았어? 막노동이나 하
며 살려고? 당신이 너무 아까워. 욕심을 부리란 얘기가 아냐.당
신의 능력을 조금만 더 현실적으로. 우린 너무 가난해. 난 이
가난이 싫어
Y씨 =가진 게 부족하다면 채우려 하지말고 욕심을 버려
애인 =나, 당신 사랑해. 내가 당신의 첫 여자였던 것처럼 내게도 당
신은 첫 남자이고 마지막 남자이길 바래. 하지만.... 나, 버리
지마. 당신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
Y씨 =(쓴 웃음)
애인 =우리 그렇게 살아, 응? 날 위해 당신이 조금만….
Y씨 =왜 그랬니? 왜 내게서 떠날 핑계거릴 만들었니?
애인 =아니, 그렇지 않아. 나 당신 사랑해. 사랑하고 싶어
Y씨 =나라는 인간에게 싫증을 느꼈구나. 그래서 니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하고 산다해도 언젠가는,
애인 =(말 끊으며) 그래, 날 속물이라 욕해도 좋아. 당신을 사랑
해. 그러니까……
Y씨 =사람들은 어떤 꿈을 꿀까? 꿈이 있기는 할까? 그 꿈대로, 소
원대로, 갖고 싶은 모든 걸 가진후엔? 성공한 인생? (쓴웃음)
후회! 죽음보다 인생의 더 마지막에 찾아온 후회! 그런데도
사람들은 높은 곳으로만 오르려 하지. 내가 바라는 건 변하지
않는 것. 어린 시절, 분명히 옳고 그름이 있던그 마음. 그 기
준이 터무니없이 변해버린, 그런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는 것.
애인 =당신이 가엾어
Y씨 =날 동정하진 마
애인 =그래. 당신은 늘 옳은 사람이니까. 세상이 변하고, 변한 세
상만큼 인간의 가치가 변해도, 당신은 언제나! 그런데 어떻해?
나마저 떠나면?
Y씨 =가지마
애인 =정말 당신 주위엔 친구 하나없이 외톨이로……
Y씨 =내가 무릎을 꿇고 애원을 할께
애인 =숨이 막혀. 더 이상 견딜 자신이 없어
Y씨 =가지 마. 너 없으면 난 방황하게 될거야. 아무 의미 없어진
시간들을 보내게 될 거야.
애인 =언젠 당신이란 사람이 살았어? 행여라도 나 때문에 방황하진
마. 나 그럼 당신 절대로 용서못해.솔직해질 용기가 없어 자
신을 들키지 않게 세상밖으로 숨어버린 비굴한 사람!
Y씨 =난 사람이고 싶어.아플 땐 울고, 기쁠 땐 웃고싶은, 그런 사
람이고 싶어
애인 =아플 땐 누구나 울어. 기쁠 땐 당신보다 더 크게 웃고
Y씨 =난 양념된 돼지갈비를 먹고 싶어하는 개가 아냐. 난 사람이
고 싶어.
애인 =그래, 어쩌면 당신의 그런 착각이…… 하지만 힘들게 땀 흘
리며 사는 사람들까지 모욕하진 마
Y씨 =세상을 사랑해. 널 사랑해. 그리고 날 사랑해. 타협은 없어,
사랑하니까. 그런데 그게 뭐가 잘못돼서 사랑을 깨는 타협을
하고 반쪽만의 세상을,반쪽만의 널, 반쪽만의 날 사랑하라고
해?
애인 =남들도 당신을 그렇게 봐 줬으면 좋겠다
Y씨 =내 곁에 남아있어 줘. 우리 처음 만났던 그 마음만으로. 응?
애인 =난 당신처럼 살 수 없어
Y씨 =그럼 이제 우린……?
애인 =당신이 날 버렸어.
Y씨 =경희야!
애인 =내게 마지막 키스를 해 줘
Y씨 =마지막?
애인 =(서글픈 미소) 마지막!
Y씨 =(아니라는 고개짓) 난 늘 이곳에 있어. 널 기다릴 거야
애인 =아니. 난 돌아오지 않아. 내 행복을 빈다고 말해 줘. 그 말도
못해줘?
Y씨 =(말 끝을 흐리며) 너의 행복을……
애인 =고마워. 이제 제발 당신 생각이 안났으면 좋겠어. 그럴 수 있
을거야.
(애인, 퇴장한다)
(Y씨만 비추는 조명 떨어진다)
(Y씨, 책상에 포개어 놓은 팔 위로 얼굴을 묻는다).
Y씨(소리) =그녀가 떠났다. 이제 절반의 의미를 잃어버린 시간들을,
나는 견뎌내야 한다. 나를 유혹하는 세상을, 내가 이제 버린
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던 세상을 그리워하겠지. 나의 이중
성인가? 이 미친 놀음은 언제 끝이 나려는지. 외롭다.
파출소장(소리)=이 사람, 진술서 다 썼어?
경찰관(소리)=예. 여기요
파출소장(소리)= 조금만 있다 나가게 해 달라더니 이럴 줄 알았
지. 이봐 ,어서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어허, 이 사람이! 나
가, 빨리!.
5. 룸 싸롱
친구, 술 마시고 있다
Y씨, 여종업원에게 떠밀리다시피 하며 함께 등장한다. Y씨, 낯선
분위기가 어색할 뿐이다.
여종업원=아저씨, 들어와요. (잡아 끌며) 순진하긴. 누가 잡아
먹어요? (친구에게) 사장님이 만나기로 하신 분이 이 아저씨죠? 되
게 순진하신 거 같아. 그냥 밖에서 기다리시더라고요.
Y씨 =오랜만이다
친구 =앉아. 늦었구나.
(Y씨, 그저 쭈빗쭈빗 서 있다)
친구 =(여종업원에게) 뭐하고 있어. 자리로 모시지 않고!
여종업원=(애교섞인 목소리로 Y씨를 앉히며) 앉으세요. 아저씨,
수상해. 간첩 아냐?
친구 =쓸데없는 소리 집어 치우고, 술이나 더 가져와
여종업원=(Y씨에게 관심이 있는 듯) 이런데 처음 왔어요? 어머,
그런가 봐
친구 =술부터 내오라니까
여종업원=알았어요. (Y씨의 허벅지를 짚으며 일어선다) 아저씨,
조금만 기다리세요
(Y씨, 여 종업원의 손길이 닿자 흠짓, 놀란다).
여종업원=(웃으며) 이 아저씨 너무 귀엽다. 술 빨리 갖고 올께요
(여종업원, 퇴장한다).
친구 =어쩐 일이냐. 연락을 다 하고
Y씨 =갑자기 니 생각이 나서
친구 =뭐 할 말이라도?
Y씨 =꼭 할 말이 있어야 만나니? 소식도 궁금했고, 얼굴이나 좀
보려고.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데서?
친구 =싫어도 오늘만 앉아있어
Y씨 =자주 오니?
친구 =그럴 돈이 어딨어. 어쩌다 널 만나는 것처럼 특별한 날에
만
Y씨 =참 오랜만이다. 너 결혼하고 니 애 돌이라고 할 때,
친구 =(말 끊으며) 애가 둘이야. 큰 애가 다섯, 작은 애가 셋.
Y씨 =그 애가 벌써 다섯 살? 세월 참 빠르다. 우리가 그러니까
사년만에 만나는 거구나. (사이) 사업은 잘 되니?
친구 =그럭저럭! 넌?
Y씨 =나야, 뭘! 잘 지내
친구 =얼굴은 왜 그러니?
Y씨 =좀 다쳤어
친구 =싸웠니?
Y씨 =…….
친구 =꿈이 없어? 자존심도 없어? 그래서 가서 한 대 때리고 그
다음부턴 두들겨 맞았구나?
Y씨 =(씨익 웃는다)
친구 =정말 변함이 없어. (사이) 너 왜 아직도 이러고 사니?
Y씨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어진다)
친구 =니 모습을 보니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이 간다. 아
직도 철없는 애들처럼 인생이 어쩌고 세상이 어쩌고, 누구
나 한번쯤 자연스럽게 앓고 말 홍역같은 것에 집착해서
Y씨 =(쓴 웃음을 지으며) 내가 괜히 연락을 했나보다. (자리에
서 일어나며) 얼굴봤으니 이젠 가 볼께
친구 =넌 늘 이래. 오고, 가고, 마음 내키는대로.
(여 종업원 술 갖고 등장한다)
여종업원=아저씨, 왜 일어나 계세요? 화장실이요?
친구 =(Y씨에게) 앉아
여종업원=어, 갑자기 분위기가…… (술 병을 내려 놓으며) 아저씨,
앉으세요
Y씨 =(앉는다)
친구 =기분 나쁘니?
Y씨 =우린 늘 이렇게 만났다 헤어지고…… 우리 사이가 언제부
터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옛날엔 참 좋았는데
친구 =(여종업원에게 술 따라주라고 눈짓하며) 술 한잔 받아라
여종업원=자, 아저씨, 잔 받으세요. 제가 따라드리는 술엔 사랑의
독이 있으니까 꼭꼭 씹어 삼키세요. 아니면 오늘 밤에잠
못자요
(Y씨, 어설픈 동작으로 술 잔 받는다).
친구 =너, 저 분 뭐하는 사람같냐? 얼굴의 상처는 늘 달고 다
니는 영광의 상처니까 신경쓰지 말고
여종업원=글쎄요. 그림 그리는 사람? 예술가?
친구 =그렇게 보이냐?
여종업원=예
친구 =왜?
여종업원=아닌가? 하긴 요즘은 예술가들이 다 사기꾼처럼 생겨갖고
이런데 오면 더 이상한 짓만 하는데, 이 아저씬 순진해
보여서…… 모르겠어요. 뭐 하시는 분이세요. 우리랑은
분명히 다른 분 같은데
Y씨 =(술 잔만 들이킨다)
친구 =훌륭하신 분이다. 오직 한가지 일에만 매 달려 늘 푸
른 소나무같이 사시는 분
여종업원=야, 정말 멋있다
친구 =뭐가?
여종업원=사람이 한 우물만 파고 살기가 어디 쉬운 일이에요? 그러
니까 멋있죠.
친구 =그래서 너희들도 그러냐? 이왕에 버린 몸, 한번 접대분
영원한 접대부?
여종업원=그거하고 틀리죠. 그리고 우리가 이런 일 했다고 죽을
때까지 이 짓만 하고 살라고요?
친구 =그럼?
여종업원=나중에 시집갈 때 요조숙녀처럼 굴면 돼요. 뭐, 순직한
척은 혼자 다하는 대학생 기집애들도 이놈, 저 놈, 새
기다 나중에 시집만 잘 가던데,우리라고 못 해요? 차라
리 그런 기집애들보단 우리가 더 낫죠
친구 =(Y씨에게) 들었니? 이게 세상이다. 요즘 애들이다. (사
이) 다 마셨으면 아가씨한테도 한잔 줘라. 너의 열렬한
팬이 될거 같은데
(Y씨, 빈 술잔만 만지작거린다).
친구 =왜, 싫으냐? 비싸게 굴지말고 한 잔 따라줘라
여종업원=(Y씨의 눈치를 보고) 아니에요. 제가 따라 마실래요. 지
부지쳐! 지가 부어 지가 쳐 먹자. (따라 마신다)
친구 =정말 둘이 어울리겠다. 지부지쳐! 모든지! (허탈한 웃
음) 하하하하!
Y씨 =너, 많이 변했구나!
친구 =(못 들은 척 여종업원에게) 넌 다 마셨으면 저 선생님
잔부터 채워야지, 안보여? 아, 참! 지부지쳐! (잔 내밀며)
난싫다. 채워라
여종업원=오늘은 사장님도 이상해 보이고, 왜 그래요? 저맘에 안
들면 아가씨 바꿔 드릴까요?
친구 =나가란 말 하기 전에 촉삭거리지 말고, 술이나 따라!
(여종업원, 술 따라준다)
친구 =(Y씨에게) 내가 한 잔 따라주랴?
(Y씨, 아무 대꾸 없이 자기 잔에 술 따라 그대로 마셔 버린다)
(친구, 그런 Y씨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술 마신다)
Y씨 =(여종업을 바라보며) 자기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여종업원=제가 뭘요? 아, 저 맘에 안 들면 아가씨 바꾸라는 애기요?
Y씨 =그 얘기가 그렇게 쉽게 나와요? 아무리…… (차마 다음 말
을 할수 없다)
여종업원=이 아저씨 정말 그렇다. 여긴 원래 그래요. 비싼 돈 내고 술
마시는데 이왕이면 말 잘 듣고, 화끈하게 노는 애랑. 우린그
거 다 이해하니까 괜찮아요.
(Y씨, 여종업원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여종업원, 무안해진 듯 머리 긁적인다).
친구 =너, 분위기 좀 바꿔봐라
여종업원=노래 하나 부를까요? 뽕짝? 요즘 노래? 아무거나 신청만 하
세요
친구 =벗어라. 벗고 노래를 하든 말든 맘대로 하고
여종업원=벌써요?
친구 =저 분은 이런 거 처음 볼테니 영광으로 알고
여종업원=조금있다 할께요. 아직 술도 안 드시고……
친구 =싫으면 나가서 다른 애 집어넣고
여종업원=좋아요. 이왕 할 거, 하죠 뭘! 근데 조명 줄이고 할래요.
괜히 창피해지네
친구 =그냥 해
여종업원=그럼 팁은 두 사람 몫으로 줘야 돼요
친구 =(돈 테이블에 올려 놓으며) 벗어
여종업원=(돈 챙기고) 오늘따라 사장님 정말 이상하다. (친구의 눈
치를 보고) 알았어요, 할께요.
(여종업원, 저 혼자 한껏 분위기 돋구며 옷 벗는다)
(친구, Y씨를 바라본다)
(Y씨, 친구의 눈길이 거북하다. 여종업원의 행동도 거북하다. 애
써 외면하고 술을 마신다)
(여종원업, 마지막 속옥까지 벗어 던지려는 순간에……)
친구 =됐다
여종업원=(어리둥절하다) 예?
친구 =수고했다. 입고 나가. 부를 때까진 들어오지 말고.
(여종업원, 어리둥절 한 채로 옷 대충 주워입고 퇴장한다)
(Y씨와 친구간에 잠시간의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친구 =왜 가만히 있었니? 너라면 하지 못하게 말릴 줄 알았는데. 아
니면 그대로 나가 버렸든지
Y씨 =날 시험해 본 거니?
친구 =궁금했어. 뜻 밖의 니 전화를 받고 어떻게 변했는지. 그런데
내짐작이 맞았어. 여전히 말 뿐인 몽상가. 그 늪에서 허우적
거리는
Y씨 =(허탈한 웃음) 재밌다. 이게 너희들이 상대방을 위한다는 너
희들만의 눈물겨운 배련가 보다. 언제나 사람을 그런 식으로
판단하고, 그 판단의 기준으로 친구조차도 이미 채점을 마친
시험 문제지처럼
친구 =경희씨 소식, 아니?
Y씨 =(순간적으로 반갑다. 이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친구 =너와 헤어진 후 기껏 시집을 간다는 게, 사기꾼에 바람둥이
같은 놈을 만났어. 그 나이에 결혼해서 삼년이 지났는데 아이
도 없다. 남편이란 놈은 자기 예편네 받아오는 월급으로 온갖
나쁜 짓만 골라하며 살기에 바쁘고. 그런데 경희씬 내색 안
하더라. 이혼도 안 하겠대. 오늘,경희씨에게 널 만난다고 전
활했지. 울드라. 우는 거 처음 봤어. 너, 경희씨 그런 마음
아니?
Y씨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야. 떠난 건 내가 아냐
친구 =그럼 넌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복수를 한 셈이구나
Y씨 =난 아직도 그녀를 사랑해.
친구 =경희씨가 왜 그리 지겨워했는지. 그러면서도 왜 널 기억해
내며 마음 아파 했는지. 사랑? 경희씬 너때문에 결혼을 서둘
렀어. 널 떠난거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을만큼 너의 모습이
당당해져 있길 바라며! 그게 사랑이다
Y씨 =함께 시이소를 타며 즐길 수 없는 게임이라면 누구 하나는…
… 어쩌면, 둘 모두……
친구 =나쁜 놈! 지 한 몸 간수하지 못하면서, 언제나 말뿐인 허풍
쟁이같은 놈!
Y씨 =너의 잣대로 세상을 어떻게 살건 그건 상관없어. 하지만 너와
다르게 산다는 이유만으로 날 판단하고, 평가하려 들지마
친구 =우린 솔직히 너같은 놈들에겐 관심도 없다. 니가 사는 게 어
떤건지나 아니? 그래, 어쩌면 아까 들어왔던 그런 계집같은
아이들에겐 너처럼 사는 게 멋있어 보일지도 모르지. 신기하
니까. 그래서 관심을 보이고. 하지만 뒤돌아 서면 그 아이들
도 그걸로 끝이다. "병신!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나이값도
못하는 한심한 인간!"
Y씨 =잔인하구나
친구 =몰랐니? 그럼 알아라. 세상은 지금 내가 한 말보다 더 잔인
하다는 걸.
Y씨 =왜 내가 너희들이 사는 삶의 방식과 똑같아야 하니? 왜 너희
들은 너희들만 힘들고, 힘든만큼 돈으로 보상받으려는 그 삶
의 방식이 옳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틀린거니?
친구 =건방지게 너희들이라고 하지 마. 우리들이 너같은 놈들에겐
살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처럼 보일진 모르나, 니 발 아래 있
는 사람들이 아냐. 너보다 더 아프게 살고있는 사람들이야
Y씨 =너의 독설이 아프다. 너의 거만한 말투가 아프다
친구 =난 아직도 모르겠다. 너란 놈이 왜 이러고 사는지. 처음 엔
기대도 했었지만, 안타까움으로, 그리고…… 니가 바라는 삶
이 뭐니? 넌 왜 니가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이렇게 사니?
Y씨 =왜 사냐고? 넌?
친구 =난…… (할 말이 없다)
Y씨 =사람들은 기준을 만들어 놓았어.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
라, 학생이면 공부해라, 아니면 돈 벌어라, 똑같은 도로를
똑같은 차로 달려 똑같은일을 해라, 조금도 어긋나면 안된다,
조금도 삐뚤어지면 안된다!" 그 기준과 다르면 무조건 틀린
거지. 하찮은 인생, 병신, 한심한 놈! 좋아, 상관없어. 그런
데 왜 참견을 해? 왜 교만하게 동정하려 들어? 난, 나답게
살고 싶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있어. 사람들이 적금을
붓듯, 난 돈이 아니라 날 저금하며 나답게 살고 있어. 그런
데 그게 왜 너희들의 눈엔 철없는 애들이 꾸는 허황된 꿈처
럼 보이는거니?
친구= 나답게! 오랜만에 들어보는 얘기구나. 나답다! (쓴웃음) 그
래. 어쩌면 우린 그런 거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 잘난 밥
줄 끊어질까 간도 쓸개도 빼 놓고…… 그럼 니가 우리들에게
보여줘. 우리 나이 내일 모래면 사십이야. 지금의 폐인 같은
모습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널 인정할 수 있게. 꿈만 꾸지
말고, 그 꿈을 세상에 펼쳐 이루는 어린 왕자같은 모습을.
Y씨= 그 다음엔?
친구= 인정을 받겠지. 그만한 대접도. 그에 걸맞는 생활
Y씨= 날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너의 그 편견과 오만이 싫다
친구= (사이) 아직도 글 쓰니?
Y씨= 쓰레기들! 경희도 그랬었지
친구= 언젠가 니 작품을 놓고 친구들끼리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
다. "얜 죽어야 작품이 뜨겠다. 누가 이런 글들을 읽어? 꼭
지가 사는 것처럼 난해하고 재미없고. 그런데 써 논 글들은
많으니 유고집으로 묶으면 혹시 장식용으론!" (사이) 우린
한때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Y씨= 한때?
친구= 광호, 윤태, 인호, 영수, 너, 나! 우린 너만 빼곤 자주 만
났어. 학창 시절에 부르던 별명을 아직도 짖궂게 부르며 만
나서 애들 커가는 얘기, 나이 더 들기 전에 내 집 한 번 장
만해 보자고 기를 쓰며 사는 얘기. 서로 우리 마누라 잘났
다 자랑도 하고, 흉도 보고. 우린 그렇게 살았어
Y씨= 우린, 이제 친구로 지낼 수 없다는 얘기니?
친구= 지금 당장의 일도 모르고 사는데 앞으로의 일까지. 하지만
니가 그렇게 느꼈다면,
Y씨= 그만! 됐어. (사이) 난 아무도 귀찮게 한 적도,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난…… 아니, 듣고싶다. 왜 그래야 하니?
친구= 그냥
Y씨= 그냥?
친구= 더 이상 묻지마라. 처음처럼 "그만, 됐어" 그렇게 해. 너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Y씨= 사람들은 참 우습지? 헤어질 땐 언제나 일방적, 아주 쉽게
그냥, 그냥 싫어졌다고. 처음 만나 좋아하게 된 이유가 열
가지도 백가지도 넘던 그 관계가 그냥 싫어졌다고. (사이)
네겐 이런 말하는 내가 한없이 유치해 보이겠지만 난 정말…
친구= (일어서며) 가 봐야겠다.
Y씨= (절망감을 토해내 듯) 술을 마시고 싶다. 취하고 싶다
친구= 계산하고 갈테니 마시고 싶은만큼. 마지막으로 베푸는 우정
쯤이라 생각해 다오
Y씨= 그동안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 마지막 우정까지…… 고맙다,
내 친구야
친구= (Y씨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Y씨= 괜찮아. 가. 술 마시고 갈께
친구= 그래. 그럼 나중에 인연이 닿으면 다시 볼 날이 있을지도……
간다.
(친구, 퇴장한다)
(조명, 어두워진다).
친구(소리)=계산하지
여종업원(소리)=벌써 가시게요?
친구(소리)=잘 모셔라
여종업원(소리)=예. 그런데 계산이……
친구(소리)=달라는 대로 줘. 남는 건 니가 갖든, 저 친구를 주든
하고.
Y씨= (신음하듯) 술 좀 주세요. 술을 줘요. 술을 주세요. 목이
타요. 가슴이 아파요. 빗 속에 혼자 서 있는 것처럼 가슴
이 아파요. 목이 타요
여종업원 =(등장하면서) 오늘 사장님 완전히 기분파네. 팁도 팍, 술
값도 팍! (Y씨 옆에 앉아 팔장끼며) 이제 아저씨하고
나하고 단둘이네! 나 아저씨 맘에 들어. 너무 귀여워. 오
늘, 아저씬 내 꺼야. 알았죠?
Y씨= 술을 주세요. 술 좀 주세요
(여종업원, 술을 따라준다)
(Y씨, 연거푸 술을 마셔댄다)
(여종업원, 재미있어 하며 깔깔거린다. 애교섞인 몸짓)
친구(소리)=그래. 그럼 나중에 인연이 닿으면 다시 볼 날이 있을
지도…… 간다.
Y씨(소리)=난 친구의 그 의미없는 말 뜻을 안다. 친구는 그 말을
곧 잊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난 기다릴 것이다. 난 아
직도 그를 처음 알게되고, 떨림의 그 순간들을 기억하
기 때문이다. 내겐 아직도 감사한 일이 남았다. 누군
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일이기 때
문이다. 하지만…….
6. 공원
Y씨, 벤치에 바짝 웅크리고 누워 새우잠 자고 있다
노인, 좀 떨어진 곳에서 Y씨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Y씨의 어깨를 슬쩍 건드려 본다
Y씨, 꼼짝도 않는다
노인, Y씨의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내려는 순간 Y씨, 눈을 뜬다
노인, 깜짝 놀라 손에 들고있던 지갑을 떨어뜨린다
Y씨, 그대로 누운 채 노인을 바라본다
노인, 그 순간을 모면하려 헛기침을 해 대며 딴청을 피운다
Y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나 지갑을 줍는다.
노인= (천연덕스럽게) 그거 댁의 지갑이우? 아까부터 거기 떨어져
있던데.
Y씨= ……
노인=사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이야 먼저 보고 줍는 사람이 임자
지만……다른 놈들이 와서 줏어가기 전에 얼른 넣어 둬. 다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Y씨= 이걸 다 드릴 수도 있지만, (사이) 싫습니다
노인=그렇다고 내가 무슨 사례비를 바라는 건 아니고.
Y씨= 돈이 필요하세요?
노인=이 사람이 누굴 거지로 아나! (하면서 Y씨의 눈치를 살피며
곁에 와 앉는다) 왜? 필요하다면 만원짜리라도 한 장 줄거야?
Y씨= (지갑에서 돈을 꺼내준다)
노인=(얼른 받으며) 어, 정말이네. 지갑속에 돈도 많고! 그럼 주
는 사람 성의를 봐서……
Y씨= 남의 것도 내 것만큼 소중해요. 앞으로는 탐내지도, 훔치지도
마세요
노인=훔치다니? 누가? 내가?
Y씨= 예. 영감님이! (하며 지갑을 주머니에 넣지 않고 벤치 한 쪽에
놓는다)
노인=(횡설수설한다) 이 사람이 겨우 돈 만원 주고 누굴 도둑으로…
이렇게 억울할 데가…… 난 지갑이 떨어져 있어도 줏어서 갖지
않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 그랬다면 내 날벼락 맞아 죽
지. 내 육십평생 살아오며 남의 것이라곤……
Y씨= 아니면 됐어요.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노인=그럼 일단 받은거니…… (주머니 깊숙이 챙겨 넣는다) 하지만
다음에 이 신세는 꼭 갚으리다. 그쪽은 초면이라 나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내성격이 남에겐 절대로 신세지곤 못사는 성격이라.
Y씨= 낮에 안 다치셨어요?
노인=(유심히 살펴보고) 아, 그 양반이었구먼? 어쩐지 낯이 익다 했
더니만!
Y씨= 여기서 지내실거라 생각을 했죠
노인=괜찮아? 교통 사곤 하루쯤 지나야 알고, 얻어맞은 건 반나절 지
나면 그때야 안다고, 몸 좀 움직여 봐. 어디 부러진데 없나
Y씨= 기분이 좋아요
노인=말 하는걸 보니 괜찮구만. 내가 그렇게 맞았으면…… 어휴!
(사이) 왜 그랬어?
Y씨= 이길 줄 알았나 봐요
노인=그 체격으로? 어림도 없는 소리. 앞으론 그런 일이 생기면 냅다
도망부터 치고 봐. 붙어봤자 뻔할 뻔잔데 죽을 둥, 살 둥, 모르
고 왜 덤벼들어! 힘이 없으면 눈치라도 빨라야 사는 법이야.
Y씨= (사이) 혼자세요? 가족은요?
노인=사람이야 결국엔 다 혼자지. 나는 나, 너는 너!
Y씨= 가족은요?
노인=그런 건 묻는 게 아냐. 알아 뭘 어쩌려고. (주머니에서 반쯤 남
은 소주 꺼내 마신다. 마시고 Y씨에게 술잔 건네며) 한 잔 줄까?
Y씨= (노인의 잔을 받아 마신다)
노인=한 잔 더?
Y씨=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내 민다)
노인=(술 따라주며) 이번엔 아껴 마셔. 얼마 안 남았어
Y씨=(술 반쯤 마시고 잔 내려 놓는다)
노인=아, 춥다. 이런 날은 따뜻한 구들방에서 몸이나 지지고 누워 있
으면 정말 좋은데. 배 부르고 등 따시면 뭔 걱정이 있겠어. 그
게 바로 천국이지. 야, 정말 춥다.
Y씨= 소년이 살았어요. 소년의 부모는 소년이 기억도 할수 없는 오래
전에 죽고, 소년은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았어요
노인=소년? 그 소년이 누군데?
Y씨= 어느날 소년의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소년은 아무도 돌봐줄 사
람이 없는 외톨이로 남게 되었어요. 마을에선 회의가 열리고 마
을 이장님은 궁리 끝에 소년을 고아원으로 보내려고 했죠. 소년
은 할머니와의 추억이 있는 고향을 떠나기싫어 애원을 했었지만,
알고 있었어요.자긴 고아원으로 보내질수밖에 없다는 사실을.그
러던 어느날 소년의 집에 강아지 한 마리가 찾아 들었어요. 그
강아진 다리 하나를 잃고 절룩이고 있었죠. 소년은 그 강아지를
정성껏 돌봐 주었어요. 얼마 후, 마을 사람들이 소년을 보낼 고
아원을 정하고 소년의 집으로 왔을때, 소년의 품에 안긴 강아지
를 보게 되었어요. 다리 하나를 잃은 그 강아지를. 그 강아진
이장님집에서 기르다 내다버린 강아지였죠. 곧 죽을줄 알고. 그
런데 그 강아지가 다시 제가 있던 곳을 찾아헤매다 다리 하나를
잃어 버리게 되었던 거죠. 이장님과 마을 사람 사람들은 그 후
소년을 고아원으로 보내겠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어요. 소년은
이장님과 마을 사람들 모두의 자식으로 고향에서 살 수 있게 되
었어요
노인=그 소년이 자네야?
Y씨= (고개를 가로 저으며) 소년을 만나고 싶었어요. 소년이 되고 싶
었어요
노인=그 아이가 부러워서?
Y씨= (고개를 끄덕이며) 예. 부러워서요
노인=정말 부러울게 다 얼어 죽었다. 고아가 뭐가 부러워? 난 또 자
네 얘기라고
Y씨= (술 마시고 일어난다)
노인=어디 가려고?
Y씨= 잠이 와요. 자고 싶어요.
노인=어디서? (Y씨를 따라갈 기세로) 혹시 여관같은데서? 그럼 나
도 따라가면 안 될까? 어차피 돈 내고 자는 방, 혼자 자나
둘이 자나 마찬가지잖아. 참, 줄 것도 있고. 어디다 뒀지?
(주머니에 대충구겨 집어넣어 두었던 노트 꺼내 주며) 자네
거 맞지? 혹시 몰라서 갖고 있었는데
Y씨= (노트를 받아 한동안 바라보다 벤취에 슬그머니 앉아버린다)
노인=거기 뭐가 있었어? 잃어버렸어? 그래도 난 몰라. 나한테 뭐
라고 하지마
Y씨= (실성한 듯한 웃음을 터뜨린다) 흐흐흐흐흐!
노인=(놀라서) 왜 그래?
Y씨= (웃음을 멈추고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노인=(주춤 물러서며) 사람 무섭게 쳐다보지 말고 얼굴 저리 치워!.
Y씨= (꿈을 꾸 듯) 아프다. 병에 걸렸다. 그건 몸 속에 있는 세포
들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세포가 늙고 병들어
서. 그럼 몸이 아프지 않게 하려면? 병에 걸리지 않게 하려
면? 아세요?
노인=???
Y씨= 병들고 늙은 세포들이, 건강한 세포들의 먹이가 되어야 해
요. 자살은 안돼요. 죽지 않고 살아서 잡아 먹혀야 해요. 신
선한 먹이. 그러지 않으면 건강했던 세포마저 굶주려서 병들
게 되니까요. 오직 둘 중의 하나. 함께 죽든지, 하나를 위해
하나가 잡아 먹히든지. (허탈한 웃음) 흐흐흐흐흐!
노인=취했구만. 두 잔마시고. (혀 끝을 다신다) 쯧쯧쯧!
Y씨= 잡아 먹는 쪽은 늘 당연하고, 잡아먹히는 쪽의 결과는, 없어
요. 변명의 기회마저 없어요. 잡아 먹혀야 할 것들의 기준만
있을 뿐이에요. 원래그런 거니까. 잡아 먹는 것들의 이유만
있을 뿐이에요. 기준! 달면 삼켜라, 쓰면 뱉어라!
노인=뭔 소리를 하는지! 젊은 사람이 왜 그래? 그런 얘기말고 재밌
는 얘길 해봐, 재밌는 애기. 그런 얘기를 해야 친구들이 모여
서 같이 놀지. 뭐, 뭐가 어쩌고 어째? 그런 얘기, 몰라. 그런
얘길 왜 해? 가뜩이나 지랄같은 세상 편하게 생각하고, 편하
게 살자고 안달이 나있는데. 안 그래?
Y씨= 그럴까요? 그래요. 그랬어요. 앞으로도.
노인=그러니까 재밌는 얘기를 하라고. 계집이 들어가는 얘기. 그
중에서, 구경해 본 적 있어? 오입하는 거 말야.
Y씨= 아뇨.
노인=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여태 그런 구경도 못 해 보고. 하긴
그런 구경은 돈 주고도 못 하지. 눈치가 빨라야 할 수 있는
데, 자넨! 그럼 여태 몇여자나 자빠뜨려 봤어? 암만 못자빠
뜨렸어도, (Y씨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 보고) 가만히 보니까
자네가 분위기가 있네! 괜찮아.옷만 좀 챙겨입고 깨끗이 하
고 다니면 지금도 통하겠어. 그러니까 여태까지 다섯? 그건
너무 적다. 여섯? 일곱? 아예 꼭 채워 열? 솔직하게 말해봐
Y씨= 한 사람!
노인=한 사람?
Y씨= (노인을 바라보며) 재미 없어요?
노인=응. (생각을 바꿔) 아니. 감동스러워. 아직도 자네같은 사
람이 있나 해서
Y씨= 다시 만나고 싶어요
노인=애들은 있고?
Y씨=우린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어요
노인=그럼 자네가 돈 못 번다고 헤어지자고 그랬구나? 그리고
다른 남자랑!
Y씨= 이젠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해 주고 싶어요
노인=미련은! 세상에 반이 계집이야. 신문도 안 봐? 결혼했어도
주인없는 계집들이나 마찬가지라고. 결혼은 했어도 연예는
오우케이(OK)! 하긴 늙으면 그 짓도 못 하지. 할 때 왕창
해 둬야 나중에 그거 떠 올리는 재미로 살지.
Y씨= 정말 다시 만나고 싶어요
노인=만나봤자 마찬가지야. 한 번 간 년은 두 번 가게 돼 있
고. 잊어. 그리고 내 말대로 해 봐. 지금 당장이라도 그럭
저럭 괜찮다 싶으면 붙잡고 오입부터. 해 본지도 오래 됐
지? 그래서 자네가 이렇게 맥아리가 없어 보인다고. 오입도
똥 싸고, 오줌 누는 것처럼 안 하면 병이 생겨. 세상 사는
재미도 없고. 내가 볼 때 자넨한텐 산삼, 녹용? 아냐! 오입
이 약이야. 그러면서 사는거야. 사는 거? 그거 별거 아니거
든. 독불장군은 없어.그냥 남들 하는대로 따라 살면 돼. 그
러다 보면 살맛도 나고, 지랄같은 세상도 조금은 달라져 보
이고
Y씨= 어떤 세상이?
노인=어떤 세상은 어떤 세상! 세상이 어디 가나! 똑 같지만 똑같
은 계집도 화장하고, 파마하고, 좋은 옷 입히고, 그러면 맛
이 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Y씨= 똑같지만 달라져 보이는 세상?
노인=그렇지. (모션 써 가며) 이렇게, 저렇게! 이제야 말귀를 알
아 듣겠어?
Y씨= (노인을 바라보며 쓴 웃음)
노인=(마지막 남은 술을 잔에 따르며) 아휴, 술이 벌써! (하며
홀짝 들이킨다).
Y씨= (노트를 집어 물끄러미 바라본다)
노인=왜? 버리려고?
Y씨= 드릴까요?
노인=내가 그 공책에다 쓸 게 뭐 있겠어. 필요없어. 그런데 그냥
버리면 반도 못 쓴 공책이 아깝잖아
Y씨= 어차피 버려지는 것. 한 번 버려지나, 두 번 버려지나……
마찬가지죠
노인=그야 그렇지만 젊은 사람이 재활용도 몰라? 나중에 필요하
면 또 사서,또 그만큼만 쓰고 버리고. 그게 다 낭비야, 낭
비. 알아?
Y씨= 알아도 그럴 수 밖에 없다면…… 아무 것도 적혀져 있지않
은 백지.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버릴 수밖에
없다면……그건 사용을 하고 더러워서 버리는 휴지와는 다
르겠죠. 두 번 버려지는 백지. 한 번은쓰임을 당해보지 못
한 백지로, 또 한 번은 쓸모없는 쓰레기로, 그렇게 버려진
다는걸 알면서도……
노인=자넨 정말 재미없어. 난 몰라. 그나저나 술이 없는데 어떻
할까? 더 마셔?
Y씨= 반복! 지겹도록 반복하겠죠. 반복, 또 반복!
노인=어떻할거냐니까? 술이 없는데 더 마실거야, 말거야?
Y씨= 마셔요. 취할 것이 필요해요
노인=그럼 바로 요 앞에 가게가 있는데 가서 사 올까?
Y씨=예. 사 오세요.
노인=그럼 줘! 내가 사 올께. (Y씨의 눈치를 보며) 아까 준 걸
로 사 와?
Y씨= 아뇨. (지갑을 가리키며) 가져가세요. 필요한 만큼 가져가
모두 사 오세요
노인=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뭘! 잠깐만 기다려. 내 얼른 갖다
올테니까.
(지갑에서 돈을 꺼낸다. 지갑 속에 들어있는 돈이 탐 난다. Y씨
의 시선을 피해 그 돈을 모두 꺼내 자기 주머니에 챙겨 넣는다)
Y씨= 영감님!
노인=(깜짝 놀라) 응? 왜?
Y씨= 다시 오셨으면 좋겠어요. 오늘은 누구라도 함께 있어 주었
으면 좋겠어요
노인=그건 나도 그래. 그런 걱정은 하지말고,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Y씨= 아뇨. 다녀 오세요. 오셔야 해요. 꼭 오셨으면 좋겠어요
노인=알았대도. 내 얼른 갔다올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노인,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지 Y씨를 바라보며 잠시간 망설인
다. 그러다 그런 모습으로 도망치 듯 퇴장한다)
(조명 어두워 진다)
Y씨= 왜 보는 눈이 둘인지, 왜 먹고 말하는 입은 하난지. 서글
픈 정신병자의 웃음처럼, 씹는 껌의 단물이 빠질 때까지,
삼키든지, 뱉든지.... 내 기나긴 외출의 끝은 이제 추억
속에 있다. 나는 익숙해져 가야한다. 세상의 규율과 법칙
에 길들여져야 한다. 그럼 나도 그때는 말 할 수 있을까?
그럼 그 때는 아무라도 내 말에 귀 기울여 줄까? 너무 지
쳤다고. 내겐 당신의 위로가 필요했다고. 그리고 당신이
꿈꾸는 그런 똑같은 세상이 그리워질 뿐이라고.
(암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