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6시해사건 미국개입설"로 몰아세워 ###
### "육본서 병력요청" 정보입수, 전화선끊고 사단장에 술먹여 ###
### 상황실장이 장태완에 신군부병력 과장보고...진압에 차질 ###.
월간조선이 단독 입수, 공개한 「5공 전사」의 하이라이트인 <12.12
사건편>에는 12.12 사건 이틀 뒤인 79년 12월 14일 미대사관저에서 두
시간 동안 진행됐던 과 글라이스틴 미대사와의 극비회담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미측은 회담장 안에 큰 개를 풀어놓았고, 그 개가
회담도중 한국측 인사들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당시 합수본부
장의 수석부관 황진하소령의 상의를 헤쳐 속에 차고 있던 권총을 노출시
켰다고 한다.
이 회담에서 글라이스틴 대사가 『이 사건이 전례가 되어 군의 규율을
저해할까 우려된다』는 식으로 12.12사건에 대한 미국의 불편한 심기를
전달하자, 합수본부장은 미국이 박대통령시해사건에 개입됐을지
도 모른다는 세간의 루머로 글라이스틴 대사를 압박해갔다.
전본부장은 『사회에서는 「내가 미 의 배후 의혹을 파헤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의 압력에 의해 박대통령의 시해범인 김재규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아달라』며 『나는 79년11월 8일 사건수
사결과 발표시 미국의 개입이 없음을 이해시키려 했으나, 이 역사적인
수사를 확실히 완결하기 위해서는 정승화총장의 혐의도 밝히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말했다.
글라이스틴이 『한국이 필요한 것은 안정과 정치발전, 경제적 안정』
이라고 반박하자, 전본부장은 『10.26직전 김재규가 대사를 만났다는 설
이있어 미국의 개입설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며 글라이스틴을 몰아세웠
다. 결국 글라이스틴 대사는 『나는 9월 26일 김재규를 만났고 10월 26
일 신민당 총재를 만났는데 미 와 대사관이 개입했다는 데 대
해 아주 기분 나쁘고 화가 난다』며 오히려 자신을 방어하는 입장에 서게
됐다.
다시 전본부장은 『「미국이 나에게 작용해서 10.26사태 처리를 엄하
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루머가 있기 때문에 정총장에 대한 조사를 분명
히해서 흑백을 가려야만 미국이 받고 있는 의혹도 풀릴 것』이라며, 미국
이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12.12를 정당한 수사 절차로 받아들여야 할
것임을 은근히 강요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전합수본부장이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을 위해 한달 전쯤인 11월 중
순부터 사전 준비를 했던 사실도 「5공 전사」를 통해 처음 확인됐다.
전본부장은 당시 보안사 소속 측근들인 , , 이학봉씨등
과 정총장의 연행계획을 세우면서 비밀리에 참가 요원들을 한 사람씩 불
러 임무를 부여하고 자체 준비를 하도록 지시했던 것으로 돼있다.
또 전본부장은 12월 8일 보안사로 방문한 백운택 소장(당시 71훈련
단장)에게 『정승화총장은 딴 수작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안보적
차원에서 비장한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인 것 같다. 그런데 정총장이 오
히려 나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것 같다』라고 말해, 정총장을 연행하기
전자신에 대한 동방사령관으로의 경질설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함께 신군부측은 정총장의 공관에서 『총장 경호병력이 합수부
수사요원보다 먼저 발사해 혼란에 빠졌다』고 지금껏 주장해왔으나, 바로
자신들이 증언한 「5공 전사」에는 『총장부관인 이재천소령이 국방장관 공
관의 전화번호 5056중 50까지 돌리는 순간 등 뒤에서 합수부 요원이 쏜
총을 맞은 것』으로 기록돼 있어 진실을 알면서도 거짓증언을 해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5공 전사」에 따르면 육본측은 처음 정총장의 연행 사건을 보고받았
을 때 정총장이 씨에 대한 비토발언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정총
장연행은 씨를 추종하는 군부 내 세력의 소행으로 추정했던 것으
로 나와 있다. 또 대통령이 12월 13일 새벽 신군부측의 병력에 의
해 국방부와육본이 점령된 뒤에도 『국방장관 없이는 정총장의 연행을 재
가할 수 없다』는 장면을 기록해,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연행 재가에는
부정적이었음을 짐작케 해주고 있다.
이에 대해 『대통령이 연행 재가를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는 신군부측의 반응도 적고 있다.
「5공 전사」는 정총장을 연행한 합수부 수사요원들이 어떤 식으로 해
서 각 군부대의 5분대기조가 총출동해 포위망을 친 한남동 총장 공관 지
역을 벗어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박진감있게 서술하고 있다. 또 총
장공관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 총장부관 이재천소령과 경호소대장 김인선
대위가 그 후 어떻게 생명을 구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
는데, 어떤 의미에서 신군부측의 반대편에 섰던 이 들 두 명의 행적을
좇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총상을 입은 이재천소령은 4∼5분 뒤 정신이 들었다. 옆에서 신음소
리가 들려 바라보니 경호소대장 김인선대위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
다. 그는 김대위를 부축해 당번병 방으로 옮겨 누였다. 그리고 육본총
장실과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총장이 납치된 사실과 김대위가 생명이 위
독함을 알렸다.
그런데 전화를 마치고 보니 김대위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는 김대
위를 찾다가 합수부측에 가담한 직속상관인 이종민 육본헌병단장과 마주
쳤다. 그는 이종민의 도움으로 승용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던 중 해병헌
병에게 제지당한다. 『저는 총장부관입니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총쏘지 마십시오. 저는 죽어갑니다!』라고 그가 외치자, 해병 헌병들은
그를 해군2차장 공관쪽 담을 넘게 해 각 군부대의 병력이 총출동된 한남
동지역을 벗어나게 도와준다.
한편, 당번병 방으로 옮겨진 김인선대위는 어디론가 숨어야 살 수
있을것이라는 의식이 들어왔다. 그는 공관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거기에
는 조그만 연못이 있었다. 바로 자기가 숨을 곳이라 생각되어 물 속으로
들어갔다. 초겨울 연못 속에서 그는 목만 내놓고 두 시간이나 숨어있었
다.
그런 뒤 밖으로 기어나가다가 자신의 부하에게 발견됐다. 그렇게 해
서 병원에 옮겨졌는데, 그는 『나는 살 수 있습니다. 치료만 잘 해 주십
시오』라고 외쳤다.
그는 5발의 총탄을 맞았으며 그 중 3발은 관통, 다른 2발중 1발은 척
추, 1발은 오른쪽 안면에 박혔다. 그런데 그는 수술도 받지 않고 되살아
났다.」.
당시 정총장 연행을 지원하러 갔던 헌병감실 기획과장 성환옥대령
일행이 공관 외곽지역을 경비하던 해병 헌병들에게 체포돼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수난당하는 장면도 있다. 「해병들은 성대령의 옷의 단추를 있는
대로 다 풀고 허리띠도 풀고 신발끈도 풀고서 위병소 옆에 꿇어앉혔다.
찬아스팔트바닥에 세 시간을 꿇어앉아 있으려니 그 춥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악이 올라 있는 해병들이 지나다니면서 성대령을
한번씩 발길로 걷어찼다.」.
당시 수경사 상황실장이었던 김진선중령(93년 대장 예편)은 「5공 전
사」에 의해 처음으로 12월 12일 밤의 행적이 드러난 경우로, 그는 합수
부측의 병력 동원 상황을 장태완수경사령관 등에게 과장되게 보고해 진
압작전을 수행하는 데 판단의 교란을 가져왔으며, 특히 합수부측의 박희
도 제1공수여단장에게 『서울로 병력을 투입하면 한강 교량에서 우리 수
경사헌병들이 막지못하도록 조치하겠다』라는 내용의 전화를 직접 걸기도
했다.
그는 직속상관인 장태완사령관의 체포에도 가담하는데, 장사령관은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되면서 김중령에게 전화로 『야, 김진선중령,
수경사에서 네가 오야붕인데 내가 지금부터 부대 지휘를 할 수 없게 됐
다. 내가 부탁할 게 있는데, 첫째 이 시간 이후에 피를 흘리지 않도록
네가 단도리(단속)를 잘해달라. 두번째 수경사의 명예와 전통이 중요하
다. 이것을 지켜달라』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5공 전사」는 이와함께 육본측이 배정도 제26사단장에게 병력 동원
을 요청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사단보안부대장 김현중령이 바깥에서
사단장실로 통하는 전화선을 끊고, 사단장에게 양주를 먹여 잠재우는 이
른바 「주공작전」으로 명명한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5공 전사」는 여직원들이 타자를 쳐 한정판 3질로 제작됐는데, 방대
한 분량 때문에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한 여직원들이 눈물을 흘렸
다는 일화가 있다.
「5공 전사」의 서문에는 『우리나라에서는 고래로 가장 강직하고 학문
이 뛰어난 사람을 사관으로 삼아 과거의 사료를 정리하고 매일 매일 국
가의 중요사를 기록케 하였으며 역사기술의 왜곡을 피하기 위하여 당대
의 기록은 왕이라도 볼 수 없게 하였다』라고 한 뒤, 『그러나 1945년 해
방이후 오늘날80년대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민족사적 시련과 격동을 겪
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간의 역사적 중요사가 빠짐없이 기록된 사료들
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라며 나름대로의 편찬 동기를 밝히고 있
다.
이 책은 일견 신군부측의 논리에서 기술됐지만, 신군부의 반대편에
선 입장도 소개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당시 상황에 대해 종합적이고 객
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