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점. 『될까? 아니, 될 말인가?』 바둑판 앞에 앉자 두려움부터 앞선다.
상대는 고희를 넘긴 백발의 70대. 그런데도 반상의 중년은 잔뜩 주눅이 들
어있다. 『괜한 지도대국 얘길 꺼냈어….』 이젠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그냥 사진 포즈나 취해달랄 걸.』 반상에 치수의 마지막 까만 돌이 파르
르 떨자 좌상귀에 백돌이 올라섰다. 착점은 소목. 헛기침. 『에라 모르겠
다. 갈데까지 가보자.』 한 칸 벌린 걸침.
서울 강남구 일원동 목련타운아파트 108동 705호. 한국바둑계의 원로 조
남철9단과 겁대가리 없이 달려든 기자와의 대국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지
난 4월3일 오후. 대강의 인터뷰를 끝내고 사진을 찍기 위해 지나가는 말로
『지도대국 한수 둬주시죠』 했던 일이 그렇게 돼버렸다. 하나 어렸을 때
어른들 바둑판 옆에서 들었던 『여기엔 조남철이 와도 안돼』의 바로 그 주
인공과 바둑판을 마주하다니…. 짜릿한 희열과 함께 「더없는 광영(?)」을
맛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 폐질환 앓으면서도 하루 담배 1갑 피우는 애연가 ----.
『뭘 나같은 바둑쟁이를….』 기자가 아파트에 들어서 인사를 꾸벅하자 깡
마른 단구의 노인은 『내가 기사감이 되겠느냐』며 겸????
부터 한다. 하지만
바둑을 조금 둘 줄 아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 없는 한국바둑계의 대부가
바로 조남철한국기원명예이사장. 기계의 원로로 쭈욱 활동하다 지난해부터
건강이 안 좋아져 건설회사에 다니는 외아들 송연씨(41)집에 칩거하다시피
지내고 있다. 그는 『요즘 건강이 어떠십니까』 하는 물음에 『갈 때가 됐나
봐』하고 남 얘기하듯 말을 던진다. 확실히 그는 설렁설렁 말을 하는 듯하
면서도 뭔가 곱씹을 대목을 남겨둔다.
행마가 자유롭다고 할까. 담배문제만 해도 그렇다. 58세 때 그는 『폐에
구멍이 났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폐기종 환자이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하루 한 갑정도는 족히 축내고 있다. 이날 4시간여 인터뷰를 하면서도 피
네스라는 담배 6개비를 바꿔 물었다. 『건강이 안 좋다면서 담배는 왜 계속
피우시냐』고 하자 『이젠 다됐는데 뭘』 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그는 『허허』
하고 웃어댄다. 이건 체념이 아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관조라는 게 이런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런 그의 자세는 그의 셀 수 없는 「바
둑판수」에서 터득한 것일게다.
하긴 올해로 일흔셋인 그는 「바둑나이」만으로도 이미 환갑을 넘어섰다.
50년대 60년대 그리고 70년대 초까지 뜨르르 하던 그의 명성을 올드팬들은
다 기억한다. 주최의 국수전 9연패를 비롯, 명인 왕좌 최고위 타
이틀 등 크고 작은 타이틀 획득만 해도 통산 23회를 기록하는 등 한 시대
바둑계를 주름잡았다. 공식기전이 생긴 1955년 이래 66년까지 11년간을 독
주한것. 그러나 장강의 앞물결은 뒷물결이 미는 법. 66년 국수위 10연패를
코앞에 두고 벌어진 김인 6단과의 대국에서 무너져 「권불십년」을 어쩔 수
없이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원로로서의 진가는 오히려 이 다음부터
발휘됐다.
우선 그는 55년에 펴낸 바둑 관련 이론서의 효시인 「위기개론」을 「바둑
개론」으로 이름을 고쳐 증보판을 냈다. 「바둑 첫걸음」 「행마의 기초」 「행
마의급소」 「사활의 기초」 「실전사활집」 「정석정해」 「 명인전전집」 「가
족놀이 아홉줄바둑」 등 20여 권에 달하는 편·저서가 뒤를 이었다. 이런
저술활동 과정에서 그가 특히 발자국을 우뚝 남긴 것은 우리말 바둑용어의
정립이다.
우선 바둑 바둘 바독 등 지역마다 달리 불리고, 쓰기는 위기라고 하던
것을 「바둑」으로 통일시켰다. 「빵때림」 「걸치다」 「뻗다」라는 용어들도 그
의 「바둑개론」에서 나온 작품들이고 「끊으면 뻗어라」 「붙이면 젖혀라」 「좌
우동형은 중앙이 급소」 「아생연후에 살타」 「4귀생 통어복이면 필승」 「두점
머리는 두들겨라」 「상대방 급소가 나의 급소」 등등 지금은 바둑 전문용어
로 굳어진 것들이 많다. 물론 책을 쓰는 이외에 우리 기사들의 해외원정이
나 각종 국내기전에 나가 후배들을 격려해 주는 일은 기본이다. 『조남철
선생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바둑행사는 시쳇말로 썰렁했다』는 게 한국기
원 관계자들의 얘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존재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아직도 심심치
않게 후배들을 바둑판 앞에서 울리는(?) 것. 지난해 국기전에서 하찬석8단
을 누른것을 비롯 94년엔 26살 아래인 6단을 제압, 본선에 진출하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이는 물론 국내기전 최고령 본선 진출 기록이다. 바둑
은 어느 운동종목 못지않게 체력과 초인적인 집중력이 요구되는 시합. 그
러나 그는 젊은 후배에, 그것도 3∼4시간에 육박하는 대접전 끝에 승리한
비결을 묻자 『가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요』 하며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
그의 바둑인생은 9살 때부터. 첫번째 스승은 다름아닌 선친 조봉구였다.
그가 풀어낸 「바둑쟁이가 된 사연」은 이랬다.
『경성법전을 나온 선친은 판검사가 되는 길을 마다하고 지금 의
전신인 식산은행을 들어갔어요. 그런데 능력과는 상관없이 승진이나 월급
에 있어 사람과 차별대우를 받아야만 하는데 무척 분개하셨던 것 같아
요.』 그래서 3형제 중 막내인 그에게 「차별할래야 할 수 없는」 바둑을 가
르치기로 결심했다. 승부가 나는 바둑은 인이 아니라 해서 이겼는데도
졌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하지만 당시 서울교동보통학교에 다
니는 그가 처음부터 바둑에 소질을 보였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조9단은 평소 『밥먹는 것보다 바둑두기를 더 좋아하는 아이가 있다면 말
리지 말고 가르쳐라. 그 아이는 틀림없이 「큰 바둑」이 될 것이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어렸을 때 바둑두기보다는 공 차는 것
을 더 좋아했다. 그때문에 그의 부친은 「어떻게 하면 저 녀석을 바둑판 앞
에 끌어놓을 수 있을까」 하는 게 고민이었다고 한다.
그의 제자인 김수영7단이 최근 펴낸 「나의 스승 조남철」이란 책엔 이렇
게 적고있다. 『장고 끝에 악수 나온다는 기훈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분명
묘수였고 또한 효과가 매우 뛰어났으니 바둑 한 판을 둘 때마다 눈깔사탕
하나를 준다는 것이었다. 눈깔사탕은 참으로 구미 당기는 미끼였고 조남철
어린이는 그 눈깔사탕에 팔려 연일 바둑판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러다 그의 바둑인생에 전환점이 된 게 보통학교 3학년 시절 일·만·지(일
본 만주 중국을 지칭)친선바둑사절로 돌아다니던 기타니(목곡실)에게 지도
대국을 받는 행운을 잡은 것.
『그때가 11살 때였지요. 오청원5단과 서울에 온 의 맹장이요 신포석
으로 유명한 기타니6단에게 7점을 깔고 두었으나 졌어요.』 그는 그러나
「상대가 신포석으로 유명하니 나는 더욱 신포석으로 나가보자」는 배짱으로
과감한 손빼기와 백의 모자씌움에는 되씨움을 하는 파격적인 수를 둬 미래
의 스승 기타니의 눈을 휘둥그레 만들었다. 『본격적으로 공부시키겠다』는
기타니의 즉석제안이 바로 들어왔고 그는 졸업후 으로 건너간다.
유학 1호이다. 그후 그는 1944년 7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해방 후
명동 적산가옥을 빌려 한성기원을 설립한다. 이 땅에 현대바둑의 장을 연
국내기원의 효시이다. 그후 조선기원 대한기원 한국기원 등으로 간판을 바
꿔달면서 16번씩이나 옮겨다니는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오늘의 한국바둑을
일궈냈다.
이 시절 그가 좌우명처럼 외우고 다닌 것은 「위천하자 불고가사」 즉 천
하를 위하는 자는 집안일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 해방 후 첫 기원을 세우
면서 마음 속에 새겼던 『바둑으로 을 앞지르자』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20년간을 독지가들을 찾아다니며 바둑 보급에 열을 쏟아 지금의 한국바둑
중흥기의 주춧돌을 마련한 개척자라는 것은 누구나 잘아는 사실이다.
프로바둑계에 가장 많은 인재를 배출한 「조남철가」의 「가장」이라는 것도
흥미로운 그의 이력이다. 『아마 선친이 막내인 나를 아껴 바둑을 가르치셨
는데 남석이 형님이 시샘을 하셨는가봐.』 얼마 전 에서 랭킹 1위인 기
성타이틀을 다시 거머쥔 조치훈9단과 조상연5단이 바로 그 남석씨의 아들
들이다. 또 최규병6단과 이성재초단은 같은 형의 외손자들, 그러니까 그의
외종손이다. 한 가문에서 5명의 프로를 낸 이 바둑패밀리의 단수의 합은
모두 30단. 그는 나라뿐만 아니라 가문에서도 바둑의 중흥을 일궈낸 셈이
다.
++++ "우리가 머잖아 바둑 종주국 될 것" ++++.
『바둑이 안 늘 때엔 어떻게 하는 게 좋습니까?』 한 수 「지도대국」을 받
은뒤 던진 질문이다. 대답은 『기풍을 한 번 바꿔보는 게 효과적』이란다.
『집짓기 바둑은 세력바둑으로, 세력이나 전투형 바둑은 집짓기 바둑으로
한 번 스타일을 바꿔보세요. 또 한 판의 바둑에서도 상대방 돌을 잡으려
했다가 한 번 그 생각을 버려보기도 하고….』.
그는 요즘 국제기전에서 우리나라 기사들이 호성적을 거두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어린이바둑이 갈수록 인구수를 늘려가는 것이 제일 기분 좋은 일
이라고 한다. 전국의 어린이 바둑교실만 해도 1천여 곳을 넘기고 있고 참
가자가 너무 많아 바둑대회를 수용할 장소가 마땅치 않을 정도가 됐다든지
하는 소식들이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
한·중·일 바둑에서 최근 우리가 바둑의 종주국인 중국과 의 내로
라하는 기사들을 보기좋게 누르고 있는것도 이런 밑바탕이 있기 때문이 아
니겠느냐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요즘 활약하고 있는 프로기사들을 어떻게 평가할까. 그는 현재 3국의 프
로기사중 이창호를 제일 높이 산다. 프로의 최고경지를 달인과 성인으로
나눠 설명하는 그는 이창호의 바둑을 『달인은 이미 벗어났다』고 평한다.
사활과 잔수에 얽매이지 않고 무엇보다 『대국을 보는 안목』이 엿보인다
는 것. 때문에 이창호는 한 60수 정도를 두면 대강 승부를 내다봐 어느 수
를 지나면 크게 무리하지 않고 판을 마무리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조치훈과 고바야시 사토루의 일 기성전 결승7번기를 를 통해
관전한 그는 『치훈이 바둑이 예전만 못해진 것 같다』고 조심스레 평한다.
두 사람 다 승부욕이 넘쳐 지나치게 사활에 얽매이는 잔수의 바둑이 됐
다는 것. 내친 김에 국내 기사들에 대한 「품평」을 요구했다. 그에 따르면
국내 4인방 중 유창혁은 노력형이고 이창호를 비롯 서봉수는 모두
탁월한 기재가 있는 기사들이라는 것이 그의 촌평이다. 그중 과 그
의 내제자였던 이창호를 비교한다면 『실력보다는 체력 차이』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유창혁에 대해선 『최근 끝내기가 밝아진 것 같다』고 점수를 주었다. 서
봉수 역시 『그냥 스러질 기사는 아니다』고 했다. 중국의 마효춘과 섭위평
으로 건너뛰었더니 『잘 모르겠다. 뭐라 얘기할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은 쉽게 인정하는 그의 스타일을 다시 한 번 엿보게 한다. 단
지 그는 『우리나라가 머지않아 바둑 종주국이란 소리를 들을 것』이라는 말
은 자신있게 꺼내 놓는다.
「바둑과 인생」 흔히들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그의 바둑관,
즉 인생관은 뭘까. 『바둑을 두다 보면 생각대로 되지 않는게 대부분입니
다.욕심을 내 상대의 돌을 잡으려 하지만 안되고 이기려 했지만 지고, 찬
스는 항상 있다가도 없어지고….』 그는 『인생도 바둑처럼 마음대로 안된
다는것』을 깨닫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외아들이 바둑과
는 거리가 먼 건설회사 과장을 하고 있다는 데에 어떤 미련이라도 없었
느냐는 질문에도 『부모 마음대로 안되는 게 자식 일』이라는 한 마디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한테 욕심이 전혀 없지도 않다.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공식기전의 바둑판 앞에 나가 앉는것』이 아직도 집에서 각종 기보를
검토하고있는 그의 유일한 욕심이다. 과연 그의 인생 여정에 놓여질 「큰
끝내기」는 어떤 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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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1월 부안에서 태어남
1937년 서울 교동보통학교 졸, 기타니 문하생으로 바둑수업
1940년 입단
1945년 한성기원 창설
1954∼68년 한국기원 창설 이사 겸 사범
1965∼66년 국수 9연패, 최고위 7연패
1968∼74년 한국기원 감사
1983년 9단
1984년 한국기원 명예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