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갑룡처사의 장손 이왕선씨 최근 공개 ###.
말의 귀 형상을 한 전북 진안군의 명소 마이산(685m) 남쪽 탑사주변
에는 여지껏 그 조성법이 밝혀지지 않아 한국의 대표적 불가사의중 하나
로 꼽히는 돌탑군이 있다.
이 돌탑 조성자인 이갑룡처사(1860∼1957년)
의 장손 이왕선씨(61)가 그간 수수께끼로 감추어져 있던 이 돌탑 조성법
의 비밀을 지난 1월8일 비로소 밝혔다.
이씨는 조성방법을 이제야 밝히
게 된 이유에 대해 "그간 신비는 신비로 남는 것이 좋다는 주윗사람들의
말에 따라 침묵을 지켜왔으나 최근 돌탑 조성자가 저의 조부인 이처사가
아니라거나 조성 연대가 1백년 전이 아닌 2백년 전이라는 등의 억측이
난무해 공개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현재 마이산 탑사 주변의 약 80기에 이르는 돌탑은 크게 보아 원추형
탑과 외줄탑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외줄탑은 맷돌만한 크기의 바위를,
아래 위 두 덩이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넣는 방식으로 쌓아올렸으며 높
이는 1m에서 크게는 5m에 이르는 것도 있다.
원추형탑은 지름 10cm∼1m쯤의 바윗돌을 기단부로부터 포물선을 그리
며 쌓아올리다가 맨 위는 외줄탑을 한 줄 얹은 모양새다. 대표적인 것이
주탑인 천지탑으로 40도 경사로 시작해 70도까지 가팔라지며, 높이는
13.5m다.
조부인 이처사가 75세때인 1935년 바로 마이산 탑사에서 태어
나 이처사가 세상을 뜰 때까지 함께 살았다는 이왕선씨에 의하면, 이처
사는 외줄탑의 경우 양쪽에서 사다리를 걸쳐 놓고 나서 바윗덩이를 각각
등에 하나씩 지고 두 사람이 동시에 한 걸음씩 균형을 맞추며 걸어올라
쌓았다고 한다.
돌덩이 쌓아올리기를 마친 뒤에는 또한 두 사람이 동시
에 한 걸음씩 내려왔다.
한편 원추형탑의 경우 하단의 완경사부분은 바윗덩이의 돌출부를 디
디며 걸어 올라가 쌓다가 경사가 급해지면 우물 정자형의 디딤대를 둘러
엮은 뒤 그것을 딛고 작업했다.
그러다가 다시 탑의 높이가 높아지면 기
존의 디딤대위에 겹쳐서 좀더 작은 크기의 우물 정자형 디딤대를 엮어놓
고 돌쌓기를 했다. 그렇게 하여 돌탑 쌓기를 마친 뒤면 맨 위의 디딤대
부터 차례로 철거해 내려왔다고 목격담을 밝혔다.
과거 이 마이산 돌탑 조성방법, 특히 사람 키가 닿지 않는 상부의 조
성법에 대해서 여러 희한한 얘기가 전해져왔다. 그중 압권이라 할 만한
것은 '이처사가 염력으로 수직이동하여 쌓았을 것'이란 설이다.
몇 년
전 어느 방송사에서는 이 염력에 의한 수직이동이 가장 유력한 조성법이
라면서, 이러한 상상을 컴퓨터그래픽화하여 보여주기도 했다. 이왕선씨
는 "조부께서 다소간 신비로운 힘을 지녔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상
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상상이 나중에는 진실로 굳어질 것 같은 걱정
때문에도 공개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갑룡처사의 본명은 경의, 자가 갑룡이다. 1860년 전북 임실군 둔남
면 둔덕리에서 효령대군 17세손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께서 돌아가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 3개월을 더 살게 하였고 3년간 시묘한 뒤 명산대천
을 떠돌며 10여 년간 수양을 쌓다가 이곳 마이산 기슭에 정착했다고 한
다.
이처사는 중생이 108번뇌를 벗어나기를 비는 뜻으로 애초에는 모두
108기의 돌탑을 쌓았으며, 쌓았던 돌탑이 무너지면 다시 보수하는 등,
거의 평생 돌탑 쌓기를 계속했다고 전한다.
진안지방에는 이갑룡처사가 돌탑을 쌓는 모습을 보았다는 이가 여러
명 생존해 있다. 또한 60년 전 주산종사의 마이산 기행문에도
'이갑룡이란 기인이 탑을 쌓고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처사의 돌탑 조성설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 것은 2백년쯤 전 진안
지방에서 살았던 조선조 문인 담락당 하립의 문집 가운데서 '금당사 우
금중씨'라는 시가 발견되면서부터다. 이 시 가운데 '속금산리 탑중중'이
란 시구가 있다. 이를 '속금산(마이산의 옛이름) 속에 탑이 줄줄이 늘어
서 있는데'로 해석, 마이산 돌탑은 이미 2백여 년 전부터 존재했을 것이
란 주장이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마이산 아래의 절 금당사
에 석탑이 층층이 서 있는 모양을 묘사한 것일 뿐'이라 주장하는 등, 설
이 난무하자 94년 진안군청에서는 3,000만 원을 들여 불교미술문
화재연구소(소장 문명대)에 정밀한 조사를 의뢰했다.
그 결과 조사단은
'주탑인 천지탑도 전래의 막돌허튼층 쌓기로 정교히 축조된 것이지만 원
추형에서 진전하여 새로운 양식인 첨두원추형으로 건립된 것으로 보아
금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단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향토사학자인 최규영씨는 주탑인 천지탑 자리에만큼은 어떤
형태로든 돌탑 형상이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음양
오행설. 즉, '음양오행상 김은 목의 상극으로서 마이산은 목이 성하고
금이 쇠한 형국인데, 도참사상에 깊이 빠져 있던 조선 태종이 금을 결정
적으로 억누르는 자리에 은밀히 천지탑을 쌓았고 그 잔존 형태를 담락당
이 보고 시를 썼을 것'이란 그의 말이다.
하지만 현재로선 금의 기운이
묶여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니, 이처사가 재축조하며 태종의 주술이 풀려
버리기라도 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