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계 증시의 관심은 온통 중국 부동산 개발업체 헝다그룹의 부도 위기에 쏠려 있죠. 하지만 중화권에서는 9월초 미국서 출간된 ‘홍색 룰렛(Red Roulette)’이라는 책이 더 큰 화제입니다.

2012년 원자바오 중국 총리 일가의 재산이 최소 27억 달러에 이른다는 뉴욕타임스의 보도가 나온 적이 있죠. 이 보도엔 이 재산을 일구고 불리는 데 일조한 여성 사업가 돤웨이훙(段偉紅·53)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원 총리의 부인 장페이리(張培莉·80)가 수양딸처럼 여겼다는 돤웨이훙은 원 총리 가문의 재산 관리인이자 동업자였죠. 장페이리와 함께 중국 대형 보험사인 핑안보험 비상장 주식을 사들여 수십 배의 차익을 거두면서 억만장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홍색룰렛.

‘홍색 룰렛’의 필자는 단웨이훙의 전 남편인 선둥(沈棟·53·미국명 데스몬드 슘)입니다. 상하이 출신인 그는 초등학교 시절 홍콩으로 이주해 퀸즈칼리지를 졸업했고, 미국 위스콘신주립대에서 회계·금융을 전공했죠. 1997년 한 미국 사모펀드 베이징 사무소 책임자로 부임한 이후 20년 가까이 중국에서 일했습니다.

홍콩계를 대표해 정치 자문기구인 중국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을 10년이나 지내기도 했죠.

◇19년 경력의 홍콩계 중국 사업가

그는 2002년 사업 과정에서 알게 된 단웨이훙과 결혼했는데, 2015년 이혼할 때까지 13년간 함께 중국 사업을 했습니다.

그가 본 중국 비즈니스 성공의 비밀은 공산당 권력자 가족과의 ‘꽌시(關係)’였습니다. 이 ‘꽌시’를 바탕으로 얻은 고급 정보와 인맥, 청탁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거죠.

고위 간부 자녀들은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손쉽게 돈을 벌 기회를 잡았고, 일반 국민과 전혀 다른 차원의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중국이 홍색 귀족의 나라라는 것이죠. 그의 책 부제도 ‘현대 중국의 부와 권력, 부패, 복수의 내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011년 6월 자가용 비행기 3대를 동원해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선둥과 단웨이훙 일행이 한 식당에서 샤토 라피트 로쉴드 와인을 시음하고 있다. 왼쪽 첫번째가 지아칭린 당시 정협 주석의 딸인 지아창이고, 그 다음은 사위 리보탄이다. 오른쪽 앞쪽 두명은 헝다그룹 쉬자인 회장 부부이고, 세번째가 선둥, 네번째가 돤웨이훙이다. /홍색룰렛

◇총리 부인의 수양딸

단웨이훙은 난징이공대 컴퓨터학과를 졸업한 엘리트 여성으로 베이징에서 IBM 서버 판매 등을 하는 타이훙그룹을 창업했다고 해요.

2001년 한 여성 모임에서 원 총리 부인 장페이리를 만난 이후 가까운 관계를 형성했다고 합니다. 고가의 선물과 화려한 접대, 해외여행 기회 제공 등을 통해 장페이리를 여왕처럼 받들었다는군요.

중국 보석업계의 대모였던 장페이리에게 돈을 벌 기회도 제공했습니다. 가장 큰 건이 바로 핑안보험 비상장 주식 투자였죠. 단웨이훙이 이끄는 타이훙그룹은 2002년 경영난에 몰린 한 국유기업으로부터 핑안보험 지분 3%를 3600만 달러에 사들였는데, 2007년 핑안보험이 상장되면서 그 가치가 수십 배 올랐습니다. 이 지분의 2%는 장페이리의 것이었죠.

돤웨이훙 타이훙그룹 회장과 원자바오 전 총리 부인 장페이리. 돤웨이훙은 장페이리와 가까운 관계를 이용해 수억 달러의 재산을 일궜다. /중국 인터넷, 조선일보DB

돤웨이훙은 장페이리와 가까운 관계를 이용해 왕치산 베이징 시장, 쑨정차이 충칭시 서기, 자칭린 정협 주석의 사위 리보탄 등 중국 권력자와 그 자제들을 다양하게 만났는데, 2008년엔 당시 국가 부주석이었던 시진핑 부부와 저녁을 같이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시진핑이 권력자로 선택된 이유

중국 혁명 원로인 천윈은 1981년 당 중앙조직부 안에 당 원로와 고위간부 자제들을 특별 관리하며 키우는 청년간부국이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우리 아들 딸이 권력을 승계하면 최소한 우리 무덤을 파지는 않을 것”이라는 취지였다고 해요.

각 가문이 한명씩 후계자를 꼽았는데, 혁명 원로인 시중쉰과 보이보는 각각 시진핑과 보시라이를 후계자로 선정했다고 합니다. 시진핑과 보시라이는 이렇게 성장했는데,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르는 마지막 단계에서는 시진핑이 앞서게 됩니다.

단웨이훙과 선둥이 아는 인맥들에 공산당이 왜 시진핑을 차기 권력자로 선택했는지 물어보니 “시진핑이 전혀 재능이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공통된 결론이었다고 해요. 마오쩌둥의 비서 출신으로 2019년 사망한 리루이(李銳)도 시진핑을 만나보고 나서 “교육을 못 받았다”고 불평을 했다고 합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 /조선일보DB

◇”출판하면 죽는다” 협박

돤웨이훙은 차기 최고지도자 후보로 꼽히던 쑨정차이 충칭시 서기와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산둥성 출신인데, 쑨 서기가 베이징을 올 때마다 밤늦게 만나 정보를 주고받았다고 해요. 단웨이훙은 쑨정차이가 베이징시 순이구 서기를 지낼 당시 순이구 수도공항 근처 땅을 불하받아 나중에 공항물류센터를 건립했습니다.

2004년 돤웨이훙 부부가 원자바오 전 총리 부인 장페이리와 함께 스위스로 여행을 떠났을 당시 제네바 호수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홍색룰렛

쑨정차이는 2017년 부패 등의 혐의로 낙마하게 되는데, 단웨이훙도 이때 실종됩니다. 중국 국가안전부에 끌려가 가족들도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린 거죠.

4년간 연락이 끊겼던 돤웨이훙이 ‘홍색 룰렛’ 출간을 앞두고 잠시 석방됐다면서 선둥에게 전화를 걸어왔다고 합니다. “중국 정부와 척을 지면 결말이 안 좋을 것”이라며 이 책 출간 포기를 종용했다고 해요.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겁니다. 그만큼 이 책에 중국이 숨기고 싶은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는 얘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