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다. 살갗에 느껴지는 햇살이 더 따뜻하고 싱그럽다. 겨우내 입던 패딩을 옷장 깊은 곳에 다시 넣어 두었다. 간만에 나와 옷 가게를 둘러보니, 여긴 이미 꽃놀이가 한창이었다. 올해 유행이라는 산뜻한 노란색 원피스부터 봄꽃을 닮은 분홍색 카디건, 나풀나풀 프릴이 달린 블라우스, 봄나들이할 때 딱 어울릴 것 같은 청바지까지 다양한 봄옷이 나와 있었다.
그러나 변호사의 옷에서는 계절 변화를 느끼기가 어렵다. 남자 변호사들은 사계절 내내 긴팔 셔츠와 타이, 재킷과 정장 바지, 구두를 착용한다. 정장의 색깔에도 제약이 있다. 주로 어두운 감색, 회색, 검은색 등의 슈트를 골라야 한다. 그나마 여자 변호사들은 원피스나 치마 정장 등을 입을 수도 있고, 옷의 색깔을 결정하는 폭도 조금 더 넓은 편이다. 그래도 법원에 출석할 때는 가급적 짙은 색감의 정장을 선택하고, 구두 또한 앞뒤가 막혀 있는 기본 디자인으로 신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한다. 정장과 소송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똑같이 ‘suit’라는 점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변호사들의 옷차림에는 제한된 선택권이라도 존재한다면, 판사나 검사의 경우 단벌 신사, 단벌 숙녀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법관은 대법원 규칙에 따라 검은색 법복을 착용하고, 앞단에는 법원 상징 문양이 있는 검자주색 양단을 대며, 회색조의 타이를 매도록 정해져 있다. 검사는 법무부령에 따라 검은색 법복에 검찰을 상징하는 문양이 직조된 자주색 양단을 댄다. 검은색은 어떠한 색이 섞여도 검은색이기 때문에, 다른 것에 물들지 않는 공정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판사와 검사가 수행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법복이 주는 무게를 견딜 수밖에 없겠으나, 한여름 장마철에도 치렁치렁한 까만 법복을 입고 재판을 진행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고될까 싶다. 법 앞에선 쿨맵시가 없다.
24년 전 그룹 ‘DJ DOC’가 노래하길 청바지 입고서 회사에 가도 깔끔하기만 하면 괜찮을 것이고, 여름 교복이 반바지라면 깔끔하고 시원해 괜찮을 것이라 하였건만, 법조계는 아직 그렇지 않다. 법조인에게 옷은 환경에 맞춘 제2의 피부로 기능하거나,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이기 이전에 재판정에서 법의 권위에 대한 존중을 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법원을 벗어나 변호사들이 의뢰인과 회의를 할 때에도, 의사의 흰 가운을 보면 마음 놓고 상담할 수 있듯이 옷차림만으로도 법률 전문가로 신뢰하실 수 있도록, 가급적 예의를 갖춘 정장을 착용하게 된다.
그렇지만 재판에 출석하고, 회의를 하는 외에 실제로 변호사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책상 앞이다. 특히 필자와 같은 이른바 ‘어쏘(Associate)’ 변호사들은 재판과 회의로 점철된 영업시간 이후, 즉 저녁부터 새벽까지가 진정한 업무 시간인 경우가 많다. 밤을 새워 기록을 검토하고 머리를 싸맨 채 서면을 작성하다 보면, 각 잡힌 정장 차림은 거추장스러워진다. 구두는 슬리퍼로 갈아 신은 지 오래고, 남자 변호사들의 넥타이도 구석에 얌전히 걸려있다. 이 정도의 고강도 트레이닝에는 트레이닝복이 적절하다며, 은밀하게 챙겨온 ‘추리닝’ 바지로 갈아입는 경우도 눈에 띈다.
결국 필자가 합리적인 소비자라면, 팔랑팔랑한 파스텔 톤 봄옷은 마음속 깊이 접어두고 어두운 정장이나 (혹은 트레이닝복이나) 한 벌 더 마련하는 것이 이득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매장을 두 바퀴 돌아본 후 필자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민들레색 니트였다. 제아무리 법조계 종사자라 한들, 마음속에 봄이 오는 것을 막는 법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