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기술’이라는 말이 이제는 일상처럼 들릴 만큼, 사회 전반을 뒤덮고 있다. 바이오, 반도체, 우주산업 등에서 우리나라가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은 자랑스럽다. 그러나 이런 성과가 지속되기 위해선, 기술의 뿌리를 튼튼히 받쳐주는 기반이 있어야 한다. 그 기반이 바로 기초과학이다.
요즘 기초과학계에는 조용하지만 절박한 위기의식이 흐르고 있다. 연구를 꿈꾸는 이들은 늘고 있지만, 정작 연구할 기회는 줄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연구 수행 의지를 가진 연구자는 2배 넘게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연구 과제 수는 오히려 줄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연구실이 후속 세대인 대학원생과 박사 후 연구원을 잃고 있다. 연구의 씨앗이 뿌려져야 할 현장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책 방향은 아직 충분한 반응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연구자 수가 크게 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 기회의 확대는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제는 근본적인 생태계 복원을 위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 기초과학 학회협의체(수학, 통계, 물리,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는 이 위기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연구 과제 확대를 중심으로 한 생태계 복원을 강력히 촉구하고 나섰다. 오는 2028년까지 기초연구 과제를 최소 3만건 이상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제안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무너지고 있는 연구 생태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가장 절박하고도 현실적인 요청이다.
기초과학은 당장 수익을 내지는 않지만, 모든 기술의 근간이 되는 언어이자 사고의 틀이다. 인공지능이 ‘똑똑해지는’ 것도, 백신이 빠르게 개발되는 것도, 날씨 예보 정확도가 높아지는 것도 그 바탕에는 기초과학이 있다. 오늘의 질문이 내일의 발견으로 이어지려면, 지금 연구자가 자신의 질문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시민의 일상과 산업의 미래가 기초과학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이 인식하길 바란다.
해외에서도 기초과학을 국가의 지속 가능한 경쟁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프랑스는 전체 R&D 예산의 약 20%를 기초과학에 투자하고, 독일은 막스플랑크연구소를 통해 연구자의 자율성과 안정성을 보장하며 장기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이제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장기적 관점의 투자 철학이 필요하다. 기초 없이 첨단은 없다. K바이오, AI, 반도체, 우주산업 등의 분야에서 성과를 이어가려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기초과학 생태계가 함께 성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금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하다. 첫째, 연구자가 자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연구에 몰입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박사 후 연구원과 대학원생이 미래 경로를 설계할 수 있도록 인건비 구조를 개선하고, 청년 인재가 기초연구에 도전할 수 있도록 유인책을 강화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박사 후 연구원의 고용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최소 계약 기간 보장, 연구 중심 트랙 중심의 경력 지원 제도, 그리고 민간과 연계된 인턴십 프로그램 등을 통해 기초연구 진입 장벽을 낮출 수 있다. 셋째, 기획~평가~집행 전 과정에 연구자가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연구자 중심의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기초과학은 긴 시간 끝에 열매를 맺는 일이다. 지금 뿌린 씨앗이 10년 뒤 우리 사회에 튼튼한 기술 강국이라는 결실로 돌아올 것이다. 기초연구 생태계를 다시 세우는 일은 미래 세대를 위한 가장 소중한 투자이며, 지속 가능한 국가 경쟁력을 위한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