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방일로 강제 징용 해법 문제를 둘러싸고 촌보(寸步)도 나가지 못했던 한일 관계가 새로운 협력 시대로의 도약을 기대하게 되었다. 물론 최근 한국 정부가 실행한 일련의 조치와 해법을 두고 한일 정치 세력과 시민 단체들은 공히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많은 말을 쏟아 내는 중이다. 때로는 점잖고 때로는 거친 언사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를 한국이 자존심을 버리고 지나치게 양보한 일본의 승리로 단정 짓기도 한다.
주지하다시피 작금의 세계는 지정학의 복귀로 불릴 만큼 위태롭고 불안한 정세를 계속 노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현실의 냉정함을 도외시한 채 과거에 집착하는 태도는 세계 10위 경제국이며 한류라는 세계 문화를 선도하는 21세기의 문화 아이콘을 보유한 한국에 맞지 않는다.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의 역할을 천명한 현 한국 정부의 위상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에 대한 ‘비교 인식’을 과감히 떨쳐야 한다. 상대적 이익의 집착은 결국 절대적 이익의 손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일제 침략의 고통을 겪은 중국은 1973년 중일 수교 1년을 앞두고 진행된 일본과의 청구권 협상에서 배상액에 집착하기보다는 명분을 택한 일화가 있다. 당시 청구권 협상을 진행한 중국의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과감하게 청구권 배상을 포기하고 도덕적 명분을 선택했다. 중국이 침략자 일본과의 협상에서 금전 문제로 설왕설래하는 것은 중국의 도덕 가치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저우언라이가 강조했던 용어가 ‘덕으로 원한을 갚는다’는 이덕보원(以德報怨)이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것은 하수이며 덕으로 원한을 갚는 것이 상책임을 웅변하는 말이다. 도덕적 명분과 우위를 점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변하지 않는 상대를 앞에 두고 우리만 이렇게 덕과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일본의 변화가 수반돼야 한다는 주장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현재 일본의 기시다 총리의 정치 상황이 확고한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고 일본 우익의 대(對)한국 인식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는 일임은 분명하다.
외교는 기본적으로 국제 무대에서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활동이며, 늘 변하는 생물(生物)이다. 우리는 지난 정부가 대북 소통에 ‘올인’하면서 한반도의 난국을 타개하려던 시도와 중국에의 지나친 기대가 가져온 어려움을 경험한 바 있다. 북한은 결국 실질적 핵보유국이 됐고, 우리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면서 연일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는 미사일 도발을 자행하고 있다. 이 상황은 과거와는 다른 인식과 해법을 요구한다.
한일 협력의 강화는 엄혹한 세계 정세의 파고 속에서 각자의 이익 확보는 물론 인류 보편 가치, 즉 민주, 자유와 평등의 수호에 대한 시대적 요구이기도 하다. 이는 한 국가의 노력과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로서, 또 북핵에 대한 공동 대응이라는 차원에서 한일 관계는 연대 구축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일본의 변화가 급선무지만, 일단 ‘이덕보원’이라는 도덕적 명분을 구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당연히 이러한 연대의 구축은 서로 득과 실을 따지는 상대적 이익의 관점보다는 양국이 함께 만들어낼 수 있는 절대 이익에 기반을 둬야 한다. 한국의 행보는 대일 관계는 물론 대미 관계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상대적으로 대중 관계나 대북 관계에도 분명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 대승적 차원에서 양국의 협력이 새로운 미래의 시발점이 될 것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