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에는 윤석열 정권 퇴치를 노래하고, 송년회에는 열 명만 모여도 시국선언을 하고…” “오 오 이십오(주·週), 6개월 안에 승부를 냅시다.”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이 연설하는 동안 이재명 대표는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며 건성건성 박수를 쳤다.

계엄 선포 3일 전인 지난 11월 30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민주당 주최 5차 장외집회는 김빠지고 시들한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기자는 반(半)은퇴상태였던 그가 어떻게 민주당 지도부로 ‘역주행’했는지 힌트를 얻었다. 학생회장 출신인 그는 ‘80년대 집회시위 선동’ 기술을 잃지 않고 있었다. 구호 발성과 손짓에 힘이 있었다. 짠하기도 했다. 구식 기술로 은퇴 후 재취업에 나선 선배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날 그는 ‘윤석열 계엄론’을 밀지 않았다. 근거를 대지 못해 “386 상상력 참 구리다”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일 후, ‘김민석이 맞았다’는 뉴스가 쏟아졌다. 자신도 포기했던 ‘윤석열 계엄론’을 증명해준 건 윤석열 대통령이었다.

2024년 11월 23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민주당 '김건희-윤석열 국정농단 규탄 및 특검 촉구 제 4차 국민행동의 날' 장외집회에 참석한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김민석 최고위원. /전기병 기자

민주당은 그간 대통령 부부를 향한 ‘혐오’와 ‘탄핵’ 두 개의 카드를 잔인하게 흔들었다. ‘유례없는 폭거’였지만, 어쨌든 합법이었다. 대통령의 ‘계엄령 발동’ 역시 합법이다. 심지어 유례없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절차상의 불법 여부는 차치하고, 국민들은 계엄령 발동 순간 바로 분노했다. 바로 그 수많은 ‘유례’ 때문이다.

‘현실의 계엄’에서는 군인이 민간인에게 밀려 넘어졌지만, ‘정신의 계엄’은 국민을 70년대, 80년대 기억으로 끌고갔다. 일종의 ‘환상통(幻想痛)’이지만 엄연한 질환이다. 계엄하면 뭐가 떠오르는지 후배들에게 물어봤다. 약속이나 한 듯 여럿이 ‘탱크? 서울의 봄(영화)’이라고 했다. 군사정권의 계엄을 겪어본 적 없는 세대가 집회현장을 가득 메운 데는 이런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군부 정권과 운동권은 사실 ‘적대적 공생관계’였다. ‘군부 독재’를 비판하며 운동권은 불법을 저질렀고, 정권은 난장판을 수습하며 권위를 유지했다. 역사는 결국 ‘자유와 민주’를 선점한 쪽 편이었다. 그래서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는 ‘운동권 전과자’를 장관도 시켜주고, 국회의원으로 뽑아줬다. 기름진 권력은 오래지 않아 산패했고, 그 정점에 조국과 윤미향이 있었다. ‘운동권 청산’ ‘586 청산’이 시대정신이 된 것은 자연스러웠다.

여의도 국회 담장에 '12·3 비상계엄 사태' 당시 우원식 국회의장 등이 국회 진입을 위해 넘었던 담장을 표시한 문구가 붙어 있다. /연합뉴스

그 흐름에 역행이 일어났다. 12월 3일 밤 11시 전후, 국회 정문이 닫히고 의원들의 입장이 막혔다. 85년생 이준석은 경찰에게 말로 따졌고, 57년생 운동권 우원식 국회의장은 다짜고짜 담을 넘었다. ‘월담 우원식’ 탄생의 순간이다. “역시 운동권 근성 있다”는 찬사가 나왔다. 운동권 출신 이학영·남인순·박홍근 민주당 의원은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며 곧바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80년대 초식(招式)’은 이뿐 아니다. 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교수들의 ‘시국선언문’이 대유행이다. 추위와 안전사고 외에는 특별한 위협이 없는 집회에 나가 20대들이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40년 전 나온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무료 커피’를 마시며 ‘광주의 주먹밥’이 떠올랐다는 글을 올린다. ‘낙인찍기’도 운동권의 전유물인데, ‘정치병 586′들은 시위 현장에 나오지 않은 20대 남성을 ‘극우화’됐다고 공격해댄다.

야당은 ‘벚꽃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 ‘겨울 광장’에서 인민 재판 완결판을 찍으려 할 것이다. 이런 일에 이골이 난 운동권들이 큰 그림을 그리고, ‘매력적 상품’을 기획해 선봉에 올릴 것이다. 586 혹은 운동권의 ‘정년 연장의 꿈’, 대통령의 계엄령이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