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한국은 산이 많은 나라이다 보니 골짜기도 많다. 조선 팔도에는 수많은 골짜기들이 있다. 이 골짜기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골짜기마다 다 사연이 쌓여 있다. 그 사연들은 결국 인간 세상의 풍파를 견딘 이야기들이다. 역사의 풍파, 자연의 풍파, 개인사의 풍파들이다. 지리산 마니아를 따라서 함양군 마천면의 백무동 계곡 어느 산장에서 일박을 하게 되었다. 꾀죄죄한 민박집일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별 기대도 없이 숙소의 방 안에 들어섰더니만 창문 밖으로 보이는 그 경치와 계곡 물소리가 나를 사로잡는다. 2층 숙소의 방에서 내려다보니까 숙소 바로 옆이 백무동 계곡이었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 계곡 바닥에는 마구간만 한 바위들이 용의 이빨처럼 박혀 있었고, 그 이빨 사이로 계곡물이 굉음을 내며 세차게 흐르고 있다. 마음속의 땟국물을 다 씻어 내주는 물이요 소리였다. ‘그래! 수시로 자연에 돌아와서 탁한 마음을 씻어 내야지!’ 하는 마음이 들도록 만드는 계곡풍류(溪谷風流)였다. 문씨 성을 가진 산장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백무동에는 계곡 위쪽으로 상백무가 있고, 여기는 중백무이고 좀 더 아래쪽으로 하백무가 있다고 한다. ‘백무’는 ‘白霧’로도 표기되고, ‘百巫’라는 뜻도 있다. 산 위에서 보면 이 백무동 계곡에서 일어나는 수증기가 흰색의 안개처럼 보인다. 마치 곱디 고운 흰색의 허리처럼 보인다. 百巫라고 한다면 이 백무동은 한국 토속신앙의 메카라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에 계시는 영험한 천왕할매에게 경배하고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무당들이 모여 있던 곳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골짜기에서 대대로 500년을 살아온 집주인 문호성(68)씨에 의하면 천왕할매가 8명의 무당 딸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 8명의 무당 딸들이 조선 팔도에 각기 퍼지게 되었다는 전설도 소개한다. “그러면 그 천왕할매의 남편은 누구요?” “두 사람이지요. 하나는 신라 때의 엄천사(嚴川寺) 법우대사(法雨大師)이고 다른 하나는 마적도사(馬跡道士)라고 알려져 있죠.” “마적도사의 신통력은 뭐요?” “데리고 있던 당나귀를 장날에 보내서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게 했다는 거요. 내일 아침에 마적도사가 도를 닦던 마적대를 가 봅시다.” 지리산 동쪽인 천왕봉에도 할매 신화가 있고, 서쪽인 노고단에도 삼신 할매를 모시던 전통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하다. 불교와 도교를 넘어 그 밑바탕에는 할매 신앙이 깔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