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원 도쿄 특파원

“막(幕)이 오르자 연극이 끝나버렸다.” 아베 총리의 사임 발표 직후 스가 관방장관이 후임으로 사실상 결정된 데 대한 일본 언론의 평가다. 자민당을 지배하는 호소다파 등 5 파벌의 영수들은 밀실 회합에서 일찌감치 스가를 차기 총리로 결정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평처럼 전광석화 같았다.

지난 10일간 나가타초(永田町·일본 정치 중심지)에서 벌어진 일은 이곳의 정치가 자민당이 출범하던 1955년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줬다. 파벌주의, 밀실 정치는 여전했다. 차기 총리 결정 과정에서 국민 여론과 민주주의는 중요하지 않았다. 14일 자민당 총재 선거, 16일 국회의 총리 선출은 요식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석에서 만나는 일본의 지식인 상당수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그렇다고 일본 정치에서 배울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베의 ‘수출 규제’ 만행(蠻行)과는 별도로 이번 기회에 청와대 역할을 하는 총리 관저(官邸)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 정치의 핵(核)인 관저는 청와대와는 달리 기자들이 총리를 근접 관찰하는 시스템이 정착돼 있다. 총리와 기자들은 미 백악관처럼 같은 건물을 사용하나 더 개방적이다. 총리는 5층에서, 기자들은 1층에서 일한다. 각 언론사 기자들은 3층 로비에 자유롭게 올라가 갈 수 있다. 이곳에서 밖을 오가는 총리에게 질문하고 방문객을 주시한다. 일본 신문이 매일 누가 총리를 만나는지 파악해 보도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베의 사임 원인이 된 건강 이상을 가장 먼저 눈치 챈 이들은 그를 매일 지켜보던 젊은 기자들이었다. 한 방송사는 로비에서 아베의 걸음이 4월 평균 18.24초에서 8월 20.83초로 2초 이상 느려졌다고 보도했다. 다른 언론사는 그가 엘리베이터에 타기 위해 방향을 틀 때 벽에 왼손을 기대는 것이 건강 이상 징조라고 분석했다. 이렇게 ‘감시’받던 아베는 결국 궤양성 대장염 재발을 밝히고 사임 발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스템은 우리도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부터 가능했었다. 문 대통령이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 정부청사로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파기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도쿄에 근무했던 전직 외교관의 양국 비교는 정곡을 찌른다. “일본 관저 출입기자는 매일 총리를 못 보면 땡땡이쳤거나 총리가 외유 중이다. 한국 청와대 출입기자는 특별한 일 없으면 대통령 볼 일이 없다.”

아베는 올 들어 퇴임 발표를 포함, 총 13회의 공식 기자회견을 가졌다. 약 20일에 한 번꼴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1월 이후 한 차례도 회견을 갖지 않았다. 8일 야당 원내 대표의 “전임 대통령을 불통(不通)으로 몰아붙이더니 지금까지 기자회견 몇 번이나 하셨느냐”는 질타는 그가 자초(自招)한 것이었다.

아베가 올 초부터 지난 5월까지 정기국회에 출석해 답변한 시간도 160시간에 이른다. 정기 국회가 열릴 때는 아베가 야당 의원과 1대1 토론하는 모습이 지겨울 정도로 TV에 나왔다. 야당 의원이 그에게 “도미는 머리부터 썩는다”며 모욕을 주는 장면도 고스란히 생중계됐다.

박근혜를 비롯한 한국 대통령들의 비극(悲劇)은 모두 청와대의 폐쇄성과 불투명성에서 비롯됐다. ‘촛불 대통령’은 다를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비공개, 소통 단절, 비밀주의 검은 장막은 오히려 더 두꺼워졌다. 청와대 운영에서 온 국민이 싫어하는 아베보다도 못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문 대통령도 전임자처럼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청와대의 안락함에 빠져버린 것이 아닌가. 임기 말로 가면서 ‘남자 박근혜’로 불리는 그가 전임자의 말로(末路)를 따라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