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8.09. 03:00
대전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에 있는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 수소(H), 헬륨(He) 같은 가벼운 원자를 발사해 충돌시켜 다양한 동위원소를 만드는 장비다. 이들 가운데 ‘극도로 짧은 순간만 존재하는’ 희귀동위원소가 연구 대상이다. 거대하게는 우주 탄생의 비밀 규명부터 2차전지 생산까지 이 장비를 통해 연구할 수 있다. 지금껏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 ‘돈 되는’ 응용과학이 아니라 성과가 언제 나올지 불확실한 기초과학에 대한민국이 눈을 돌리고 있는 물증이다. 기초과학연구원 산하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소장 홍승우가 말했다. “대한민국과 선배 과학기술자들에게 무한히 감사하다”고./박종인 기자대전(大田)은 조선 후기 고지도에 드문드문 나오던 지명이었다. 공주와 충주, 청주 그리고 회덕과 진잠, 연산, 옥천 등지가 사람이 살던 도시였다. 러일전쟁이 임박한 1903년 12월 28일 일본 정부는 ‘경부철도 속성 명령(京釜鐵道速成命令)’을 공포하고 군사철도 경부선을 대전천(大田川) 옆을 지나는 노선으로 확정했다. 인구가 밀집한 공주로 우회하는 노선은 경제적으로는 이득이 예상됐지만 토지 매입 비용이나 군수물자 신속 운송을 ...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7.12. 03:00
대한민국 원자력의 아버지 이창건이 대한민국 1호 원자로 트리가 마크2(TRIGA MARK II) 앞에 섰다. 1929년생인 이창건은 30년 뒤인 1959년 대한민국이 도입한 이 원자로를 운전하며 대한민국 미래를 설계했다. 먹고살 일도 막막했던 1950년대부터 이들을 길러낸 지도자, 그리고 이들 전문가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아버지들이다. 서울 공릉동에 있는 트리가 마크2는 핵심은 다 해체되고 외형은 근대유산으로 지정됐다. /박종인 기자대한민국 원자력의 아버지 이창건 박사를 만났다. 1929년생으로 올해 94세다. 식민시대에서 해방, 근대화 시기와 21세기를 다 살아낸 역사다. 평안도 선천에서 내려와 배재고와 서울공대 전기공학과, 미군 특수부대인 켈로(KLO)부대에 근무한 뒤 평생을 원자력 개발에 바쳤다. 90을 4년 넘긴 전 원자력학회장, 현 원자력문화진흥원장은 겸손했다. 대화는 활기찼고 유머가 넘쳤다. 딱 두 차례 이 역사를 품은 과학자가 정색을 했다. 이승만을 이야기할 때, 그리고 후쿠시마 처리수를 이야기할 때.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7.05. 03:00
1959년 7월 15일은 대한민국 과학계에 큰 획을 그은 날이었다. 문교부와 학술원이 후원한 ‘제1차 원자력학술회의’가 서울 동숭동 서울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렸다. 제목은 원자력이지만 이 학술회의는 과학기술계 다양한 분야 학자 600여 명이 참석한 종합학술회의였고 공화국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 최대 규모 과학기술 학술회의였다. 전날인 7월 14일 당시 양주 공릉리 서울공대에서 열린 연구용 원자로 1호기 기공식을 계기로 열린 이 학술회의에서 과학-기술학계는 원자력 종합개발정책과 과학기술진흥법 제정을 정부에 요구했다. 이들 과학자의 요구는 7년 뒤인 1966년 12월 과학기술진흥법 제정으로 결실을 맺었다./서울기록원* 유튜브 https://youtu.be/NOTTSBAvJxE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역사는 그냥 움직이지 않는다. 방향을 정확하게 읽는 지도자, 방향에 동의하는 인력(人力) 그리고 이들과 함께 현장에서 움직이는 노동력이 결합할 때 역사가 이뤄진다. 조선 500년 동안 과학자와 기술자는 사대부들 멸시 속에 중인(中人) 내지 천민 취급 받으며 살았다. 국부(國富)와 민생(民生)을 위한 혁신도 찬사는커녕 이름도 제대로 ...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6.28. 03:00
서울 한복판 세종로사거리 뒷골목에 있는 사무실건물 ‘사조빌딩’(왼쪽 흰 건물)은 대한민국 과학기술 혁명이 태동한 역사적인 장소다. 1959년 이승만 정부가 만든 원자력원은 4년이 지난 1963년 뒤 이 자리에 건물을 신축하고 방사선의학연구소를 개설했다. 그리고 또 4년이 지난 1967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처 첫 사무실이 이 병원 건물에 입주했다. 1970년 과기처가 종합청사로 이전할 때까지 이 건물에서 이승만 정부가 만든 과학기술의 산실과 박정희 정부가 신설한 과학기술 근대화 작업실이 공생하며 대한민국을 이끌었다./박종인 기자1963년 9월 13일 서울 광화문 네거리 뒷골목에 정체 모를 건물이 들어섰다. 주소는 중구 정동 2번지였다. 완성된 외곽 생김새는 여느 고층건물과 달랐다. 니은 자 형태로 지은 건물은 골목길 쪽으로 창문마다 사방이 시멘트 격벽으로 가려져 있었다. 골목길 쪽 건물은 3층이고 뒤쪽 건물은 4층이었다. 널찍한 주차장이 뒤편에 있었는데, 당시 차량 대수가 그런 넓은 주차장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었다. 석 달이 지난 그해 12월 17일...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6.21. 03:00
1970년 1월 9일 서울 홍릉 시절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멤버 기념사진. 모두 미국 유수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최형섭(앞줄 왼쪽에서 세번째)의 설득으로 한국에 돌아온 박사들이다. 1967년 KIST를 방문한 미국 부통령 험프리는 “역두뇌유출(counter brain drain)”이라고 부르며 놀라워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나보다 봉급이 많은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이들은 미국에서 받던 연봉의 4분의1밖에 안 되는 대우를 받으며 과학을 연구했고 기술을 개발했다. 박근혜 정부 과학기술비서관이었던 현 한국기술경영교육연구원 원장 김주한이 말했다. “조선을 정체시켰던 사농공상(士農工商) 질서를 무너뜨리고 과학자와 기술자를 국가가 육성한 사건이었다.”/한국과학기술연구원* 유튜브 https://youtu.be/58cXvGZhkHc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65년 4월, 박 대통령이 방미(訪美)하기 직전에 연구소장들을 모아놓고 리셉션을 연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스웨터를 2천만달러어치나 수출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말을 듣던 나는 이렇게 역설했다. “그것 참 기특한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런 것만 하겠습니까? 일본은 이미 10억달러어치 전자제품을 수출하고 있습...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5.31. 03:00
대한민국은 석탄조차 외면하고 인력에 의존했던 조선과 차원이 다른 국가다. 사진은 대전광역시 대덕연구개발특구 핵융합에너지연구원이 운영 중인 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KSTAR). 태양과 같이 핵융합을 이용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장치다. 핵융합발전에는 1억도라는 초고온 플라즈마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기술이 관건이다. 연구원에 따르면 이 기술은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다. 핵분열을 이용한 원자력발전에 이어 핵융합발전이 상용화되면 대한민국은 또 한번 변신한다. /박종인 기자* 유튜브 https://youtu.be/3oMbKW5KrBc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21세기 공화국 대한민국은 원자력을 세계에 수출하는가 하면 인공태양, 핵융합에너지 개발로 세계를 주도한다. 석탄도 활용하지 못했던 나라, 오로지 인력(人力)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땔감을 확보하고 생활용품을 이용하며 삶을 영위하던 조선과 다른 나라다. “우리가 발전소를 충분히 설치해서 생활 제도나 공업 발전을 하루 바삐 진전시키는 것...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5.24. 03:00
2022년 미국 타임지가 ‘올해의 엔터테이너’로 선정한 블랙핑크.2022년 미국 타임지가 ‘올해의 엔터테이너’로 선정한 블랙핑크. 언문 즉 한글을 멸시하고 한문에 집착한 지식인들 탓에 조선 백성은 500년 내내 까막눈 신세를 면치 못했다. 10명 중 9명은 까막눈이었던 조선은 식민시대 종료 후 문맹률 80%에 이르는 문맹국으로 해방을 맞았다. 1948년 치러진 선거는 까막눈을 위해 이름과 함께 ‘작대기’로 입후보자 이름을 표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3년 ‘문맹국민 완전퇴치 계획’을 세우고 5년 동안 민관합동으로 성인 한글교육을 실시했다. 1958년 말 대한민국 문맹률은 4.1%로 급감했다. 교육은 문화적 각성을 촉발시켰다. 각성은 창조력을 만들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문화(文化)를 찾는 문화 강국이 됐다.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5.17. 03:00
1945년 10월 13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환영대회 사진첩. 소련 적군훈장을 달고 있는 김일성 뒤로 스티코프 모습(뒷줄 가운데)이 보인다. 사진첩 여백에는 한복 입은 사람이 태극기를 들고 소련군을 환영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김일성으로 인해 대한민국 건국은 혼돈 속에 이뤄졌다./국사편찬위1945년 8월 15일 35년 식민 시대가 끝났다. 새 나라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벌어졌다. 미국에서 외교투쟁을 벌이던 이승만이 귀국했다. 중국에서 투쟁하던 임정요원들이 귀국했다. 국내파 독립운동가들도 저마다 비전을 내세우며 건국 주체임을 주장했다. 거기에 소련군 소속 조선인 장교 하나도 끼어 있었다. 소련 제88정찰여단 대대장 김일성이다.서른셋 먹은 이 소련군 대위가 건국 주도 대열에 포함되면서 건국을 향하던 대한민국 진로는 험로(險路)로 변했다. 그런데 이 김일성이 한 일들은 스스로 계획한 일들이 아니었다. 테렌티 스티코프라는 당시 북한 진주 소련군 군사위원이 갓난애기 이유식 떠먹여주듯 했던 명령을 꼭두각시처럼 따라 한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 꼭두각시짓이 만든 역사는 지금도 대한민국 공화국을 독뱀처럼 죄고 있지 않은가.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5.10. 03:00
식민시대인 1926년 경복궁 앞에 세워진 조선총독부 청사는 해방 후 건국을 선포한 중앙청으로 사용됐다. 전쟁으로 파괴됐던 중앙청은 훗날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으로 철거됐다. 그 사이 이 땅에는 봉건 왕조와 식민시대가 지나고 공화국시대가 도래했다. 경복궁에는 대한민국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시간을 즐긴다. 부국와 강병으로 부활한 근대 공화국, 대한민국시대다./박종인기자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민주공화국입니다. 국민 행복을 위해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을 정책적으로 실천하는 근대 공화국입니다. 백성을 통치대상으로 삼고 부국강병을 등한시했던 봉건 조선과는 ‘전혀’ 다른 국가입니다. 조선에서 혹은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 정통성을 찾겠다는 시도는 허황됩니다. 삼일운동 때, 임시정부 때는 물론 해방 후 건국의 아버지들은 근대(近代)라는 시대정신에 따라 조선을 폐기하고 공화국 대한민국을 세웠습니다. 조선과 대한민국은 무엇이 다를까요. 왜 조선은 가난했고 약했고 백성은 주인이 되지 못했을까요. 대한민국은 그 조선과 무엇이 다르기에 21세기 지구촌 주역으로 성장했을까요. ‘근대공화국 대한민국’이 모든 금기(禁忌)를 깨고 그 답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박종인 기자
입력 2023.05.16. 07:02
박종인의 대한민국 징비록 인터랙티브 보기 → 운명의 1543년, 세계사 속에서 조선을 바라본다. 인류 역사를 진행시키는 원동력은 지성(知性)이다. 한 공동체가 소유한 지성은 외부 공동체와 교류를 통해 규모가 커지고 질적으로 진화한다. 교류 없는 지성은 없다. 서기 1543년 유럽과 조선과 일본에 상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유럽에서는 그해 3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발표로 인간 탐험시대가 시작됐다. 그해 9월 일본은 가고시마번...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4.26. 03:00
왼쪽부터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주역들인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김홍집, 어윤중. 오른쪽 아래는 1898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됐던 사람들. 왼쪽 위부터 이승만, 이승인(이상재 아들), 유동근, 김린, 안국선, 아버지를 대신한 소년수. 아래줄 왼쪽부터 강원달, 홍재기, 유성준, 이상재, 이정식. 이들 가운데 홍영식과 김옥균, 김홍집, 어윤중은 고종 정권에 의해 암살됐거나 처형됐다. 갑신정변에서 독립협회에 이르는 30년 세월 동안 결국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했고 500년 조선왕조는 참담하게 멸망했다. 대한민국은 그 500년 폐허에서 핀 꽃이다.장구한 500년 세월을 버텼던 조선의 중세(中世)가 그렇게 멸망했다. 이승만은 이후 대학에서 공부와 외교 활동을 병행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까지 김구는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몰두했다. 이상설은 연해주와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5년 ‘신한혁명당’을 결성했다. 당수는 광무제 고종을 추대했다. 고종은 1919년 죽었다. 홍영식과 김옥균과 김홍집과 어윤중 같은, 새 시대를 열망하다 처형된 인물들은 거칠게 닥쳐오는 근대를 보지 못했다. 이제 전혀 새로운 주인공이 새로운 나라, 근대 대한민국 이야기를 시작할 참이다.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4.12. 03:00
대한제국 광무제 고종은 권력 장악을 위해 근대를 포기하고 정치 파트너였던 독립협회를 강제로 와해시켰다. 개혁세력은 권력 분산을 통해 근대국가 건설을 꿈꿨지만 고종은 1899년 권력을 황제에 집중시킨 ‘대한국 국제’를 통해 반근대적 입법독재를 완성했다. 이듬해 1900년 고종은 갑오개혁 때 폐지했던 참수형을 부활시키고 이를 국사범에게 적용하겠다고 선언했다. 10년 뒤 대한제국은 식민지로 전락했다. 독립협회가 야심차게 건설했던 독립문은 일본 사진엽서에 ‘도쿠리추몬’이라는 볼거리로 전락했다./부산광역시립박물관1899년 1월 4일 황제 자문기관인 중추원 전 의관 노수학이 상소했다. ‘박영효가 한 명 있어도 위험한데 지금은 몇 명의 박영효, 몇 명의 서재필, 몇 명의 안경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독립협회 괴수들을 보이는 대로 붙잡아 남김없이 죽이시라.’ 고종은 “공분하고 있다”고 답했다.(1898년 음11월 23일 ‘승정원일기’) 이듬해 9월 29일 고종은 당시 형법에 해당하는 ‘형률명례’를 개정, 반포했다. 개정안에는 ‘황실범과 국사범 즉 역적은 참수형에 처하고 그 재산은 압수한다’고 규정돼 있었다. 외국과 연계 여부를 막론하고 황제에게 도전하는 그 어떤 이도 목을 베서 처형하겠다는 법률이었다.(1900년 9월 29일 ‘고종실록’) 근대인들이 만들어가던 근대(近代)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사라졌다.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4.05. 03:00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 문안산 북쪽 기슭에는 흥선대원군 묘가 있다. 공식 명칭은 흥원(興園)이다. 그 옆에는 흥선대원군 장남인 흥친왕 이재면과 그 가족 납골묘, 서장자 이재선 묘가 있다. 해방 당일인 1945년 8월 15일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한 이재면의 양손자이자 운현궁 궁주였던 이우가 일본 육군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이곳에 묻혔다. 1966년 이우 아내이자 박영효 손녀 박찬주는 운현궁 소유지인 문안산 주변에 공동묘지를 조성했다. 이 묘지가 모란공원이다. 부산에 있던 박영효 묘도 이곳 모란공원에 이장돼 있다. 운현궁 후손들은 흥원과 가족묘 일대 토지를 경기도에 기증했다./박종인 기자1966년 박영효 손녀이자 운현궁 이우의 아내 박찬주는 다른 사람과 함께 ‘운현관광개발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주소지는 운니동 114번지, 운현궁이다. 그리고 그해 9월 24일 모란공원묘역 기공식이 열렸다. 공동묘지 개발지역은 이 가족묘 산 너머 남쪽 기슭 100만평 부지였다. ‘모란’은 흥선대원군묘가 있는 봉우리 모란봉에서 따왔다. 부산에 있던 박영효 묘도 이리로 이장됐다.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3.29. 03:00
경복궁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 1894년 7월 23일 새벽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병한 일본군 혼성여단이 건춘문과 서쪽 영추문(迎秋門)을 부수고 경복궁을 공격했다.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던 경복궁 수비대는 고종 명에 의해 무장해제하고 퇴각했다. 이틀 뒤 일본이 아산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함을 공격하며 청일전쟁이 시작됐다. 운명의 8월 17일 일본 내각은 조선 문제 처리를 안건으로 올리고 독립국화, 보호국화, 분단화, 중립화 4개안 가운데 보호국화를 향후 대조선 정책으로 채택했다. 이에 앞서 고종이 미국에게 일본군 철병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미국 클리블랜드 정권은 이를 거부했다. 훗날 35년 식민지의 씨앗은 바로 그날 뿌려졌다./박종인 기자그리고 8월 17일, 외세에 의해 조선의 운명이 결정되던 그날이 왔다.‘나(무쓰 무네미쓰)는 4개 문제를 각의에 제출해 국가 방침을 확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방안은 1. 조선을 독립국으로 놔둔다(‘독립국’) 2. 일본이 직간접적으로 영구히 또는 장기간 그 독립을 돕는다(‘보호국’) 3. 청일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을 보전한다(‘공동통치’) 4. 이도저도 안되면 강국(强國)이 담보하는 ‘중립국’으로 만든다.’무쓰가 4개안에 일일이 장단점을 열거해 토의에 부친 결과 내각은 ‘당분간 2번안(보호국안)을 목표로 하기로 하고 후일 다시 국가 방침을 확정하기로’ 의결했다.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3.22. 03:00
충청남도 아산에 김옥균 무덤이 있다. 도로명 주소 또한 김옥균 호를 따서 고균길이다. 1912년 당시 아산군수였던 양자 김영진이 일본에 있던 김옥균 묘에서 머리카락을 가져와 이장한 묘다. 1894년 상해에서 암살된 뒤 조선으로 끌려온 김옥균 시신은 4월 14일 밤 온몸을 토막내고 칼집을 내는 부관참시와 능지처참형을 받고 팔도에 뿌려졌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10년째 감옥에 갇혀 있던 아버지 김병태는 아들 시신이 추가형을 받은 다음날 천안 감옥서에서 처형됐다. 역적이 죽은 뒤 그 시신에 처벌을 가하는 ‘역률 추시’는 영조 때, 가족을 연좌해 처벌하는 ‘노륙형’은 정조 때 법으로 금지된 형벌이었다. 법을 무시하고 복수를 완성한 고종은 “10년 동안이나 형벌을 적용하지 못한 것이 통분스럽다”고 말했다. 아버지 묘 동쪽에 아들 김영진 묘가 있다. 비석이나 석물은 없다. 식민시대 여러 군데 군수를 지낸 아들 김영진은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친일파로 분류돼 있다./박종인 기자1894년 봄날 일본에 망명했다가 청나라 상하이에서 암살된 김옥균 시신에 부관참시와 능지처참형이 집행됐다. 10년 동안 수감돼 있던 김옥균 친아버지 김병태도 처형됐다. 소급 처형과 연좌 처형. 지독한 반근대적 복수극이었다. 고종은 이를 기념하는 대사면령도 내렸다. 고종이 말했다. “요망한 역적 허리와 목을 그대로 붙여 둬서야 되겠는가.” 식민시대가 도래했다. 김옥균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던 고종은 을사조약과 합방으로 을사오적이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더 편안한 일상을 살았다. 거친 야만과 깊은 어둠에 빛을 주려 했던 혁명가 김옥균의 잔혹한 죽음.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3.15. 03:00
경복궁 경회루 연못을 동서남북 사방으로 에워쌌던 담장은 식민시대 때 철거됐다. 애초에 네 담장을 모두 복원하고 전망대를 설치하려던 문화재청은 동쪽과 북쪽 담장만 복원했다. 이유는 ‘관람객 편의’. 경복궁 동쪽에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 때 만든 총독부박물관 부속건물이 남아 있다. ‘일제가 훼손한’ 대표적인 건물인데 경복궁관리소 사무실로 쓰고 있다. 문화재청이 설정한 경복궁 복원 기준연도는 1888년이다. 완공을 앞두고 있는 덕수궁 돈덕전은 2층이던 건물을 3층으로 증축했다. 3층 용도는 덕수궁관리소 사무실이다. 대한문 앞에는 원래 규모에서 축소된 형태로 월대를 공사 중이다. 축소한 이유는 ‘보행자 편의’. 문화재청은 문화재 ‘복원’을 ‘재현’이라고 부르며 자체 원칙을 파괴하는 중이다. 유독 광화문 월대 공사만은 철저하게 원칙을 고수한다./박종인 기자문화재청이 설정한 경복궁 복원 기준연도는 1888년이다. 그런데 경복궁 동쪽에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만든 총독부박술관 부속건물이 남아 있다. ‘일제가 훼손한’ 대표적인 건물인데 경복궁관리소 사무실로 쓰고 있다. 완공을 앞두고 있는 덕수궁 돈덕전은 2층이던 건물을 3층으로 증축했다. 3층을 덕수궁관리소 사무실로 쓰기 위해서 증축했다. 대한문 앞에는 원래 규모에서 축소된 형태로 월대를 공사 중이다. 축소한 이유는 ‘보행자 편의’. 그나마 대한문은 1970년까지 33m 앞 도로 한가운데에 있었으니, 위치와 재현될 실물은 역사와 무관한 구조물이다. 이렇게 문화재청은 문화재 ‘복원’을 ‘재현’이라고 부르며 자체 원칙을 파괴하는 중이다. 그 덕에 서울은 역사 없는 역사공원, 원칙없는 테마파크로 전락했다.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3.08. 03:00
감격의 해방. 1945년 8월 15일 촬영한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이다. 촬영 장소, 촬영자, 촬영 시간은 매체마다 중구난방이다.1945년 9월 8일 항공사진을 보면 형무소 남서쪽 담장에 사형장이 찍혀 있다. 이를 확대해보면사진⑧ 사형장 주변에 나무가 없다! 사형장 정면에 둥그렇게 생긴 나무 한 그루가 보이는데, 이는 위치와 수종이 문제의 미루나무와 무관하다. 즉 소위 ‘통곡의 미루나무’는 식민 시대가 아니라 해방된 이후 어느 시점에 심은 나무라는 뜻이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람이 부여잡고 통곡할 나무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괴담이다.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2.22. 03:00
경기도 여주 문장마을에는 1884년 갑신정변 주역인 홍영식 무덤이 있다.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과 서광범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홍영식은 고종을 수행해 민비와 고종 부부 측근인 무당 진령군의 북묘(北廟)로 갔다가 그곳에서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살해됐다. ‘승정원일기’와 ‘고종실록’에 따르면 홍영식은 살해된 뒤 다시 한번 토막이 나고, 가족이 수습한 그 시신 또한 부관참시됐다. 근대를 지향했던 한 지식인에게 닥친 가장 전 근대적인 죽음이었다./박종인 기자근대 이전, 동서를 막론하고 똥오줌 약재와 잔혹한 형벌을 가지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하지만 때는 온 지구가 근대를 다투던 19세기 후반이었다. 더군다나 이웃 일본이 그 근대 한복판을 휘젓고 다니던 시대에 조선 지도부는 똥오줌을 기꺼이 권하고 기꺼이 먹었다. 박규수에게 개화를 배우고 일본과 미국에서 근대를 목격한 홍영식에게는 두려운 풍경 아닌가.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홍영식은 목숨을 걸었다. 고종은 기꺼이 그 목숨을 빼앗았다.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2.15. 03:00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는 조선 첫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무덤이 있다. 1894년 이래 갑오개혁 정부를 이끌던 김홍집은 을미사변(1895) 넉 달 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주한 1896년 2월 11일 오전 서울 광화문 육조거리에 있던 경무청에 구금됐다가 경무청 경무관 안환(安桓)을 비롯한 고종이 보낸 경무청 순검들에 의해 살해됐다. 시신은 함께 살해된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시신과 함께 새끼줄에 묶여 종로거리를 끌려다니다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돌팔매질을 당했다. 거리에 방치됐던 시신들은 “외국인 눈에 민망하다”는 신하들 조언에 따라 고종이 가족에게 인수시키라 명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던 조선 첫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유해는 그래서 지금 대자동에 영면해 있다./박종인 기자문 밖에 인파가 ‘입추의 여지도 없이’ 가득했다. 그러자 경찰들이 칼을 뽑아들고 사람들을 쫓아낸 뒤 김홍집을 차서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여러 경찰이 일제히 난도질을 해 김홍집을 죽였다. 이어 정병하를 끌어내 한 칼에 그를 죽였다.(일본외무성, ‘일본외교문서’ 29, 353)경찰이 이들 시신에 ‘大逆無道(대역무도)’라 써붙이고 새끼줄로 다리를 묶어 종로에 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돌과 기와조각을 그 시신에 던져 살이 터지고 찢어졌다.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2.08. 03:00
고종(재위기간 1864~1907) /국립고궁박물관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일본군이 조선에 출병하자 조선정부는 철수를 요구하고 고종은 청나라에 일본 퇴출을 '애걸' 했다. 그런데 그해 가을 조선관군이 일본군 지휘 하에 우금치에서 동학군을 궤멸시키자 고종은 "나라가 위험하니 철군하지 말아달라"며 일본특명전권공사에게 철군 철회를 요청했다. 교과서에서 알려주지 않는 역사적 진실이다.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2.01. 03:00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에는 영국인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三浦按針) 묘가 있다. 미우라 본명은 윌리엄 애덤스다. 423년 전인 160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리프데호가 난파하며 애덤스는 일본에 정착했다. 에도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애덤스를 외교 고문으로 고용하고 사무라이 신분도 줬다. 1613년 영국 동인도회사 클로브호가 일본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자 애덤스는 막부와 동인도회사를 중재해 히라도에 영국 상관 개설을 도왔다. 클로브호 선장 존 새리스는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갑옷 2벌을 비롯한 선물을 받아와 잉글랜드 왕 제임스1세에게 헌상했다. 애덤스는 1620년 히라도에서 죽었다. 갑옷도 애덤스 무덤도 모두 교류의 상징이다./히라도=박종인 기자임무를 완수한 새리스는 일본을 떠나 이듬해 9월 런던에서 제임스 1세에게 임무 완수를 보고하고 갑옷 2벌을 헌상했다. 그 갑옷을 한 달 전인 21세기 1월 영국과 일본 총리가 나란히 서서 구경했다. 저 두 리더가 갑옷 앞에 서기까지 미우라 안진, 윌리엄 애덤스 발자국이 찍혀 있다. 그 발자국을 따라서 근대화의 길목에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같은 일본 메이지유신 지사들은 바로 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근대를 목격했다. 교류가 가진 힘이 이렇게 묵직하고 강하다.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1.18. 03:00
충남 공주시 신풍면 한 산속에 있는 조병갑 무덤. 1894년 동학농민전쟁 후 조병갑은 고향인 산 너머 예산 대흥면으로 숨었다가 이곳 신풍면에서 생을 마쳤다. 조병갑 무덤 옆 능선에는 그 아버지 조규순 부부 묘가 있다. 두 사람 묘가 있는 이 능선 전체는 지금도 그 후손 소유다. 동학란이 진압되면서 조병갑은 전남 고금도로 유배형을 받았지만 이듬해 음력 7월 다른 동학 관련 탐관오리 278명과 함께 사면되고 이후 법부 민사국장, 한성재판소 재판관, 황실 비서원 주임관으로 승승장구했다. 만석보를 만들고 아버지 조규순 공덕비 비각을 만들며 돈을 착복한 행위는 개인적인 비리였지만, 역사적으로는 동학을 촉발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탐관오리 하나가 망국의 지옥문을 연 것이다. 정읍에 남아 있는 만석보 흔적과 조규순 공덕비, 그리고 공주 산기슭 상석도 비석도 없는 조병갑 무덤이 129년 전 흑역사를 보여준다./박종인 기자조선에서 청일전쟁이 터졌다. 동학전쟁은 조선관군과 일본군 연합작전에 궤멸됐다.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대륙 진출을 노리던 일본이 마침내 조선을 집어삼킬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과정을 역추적하면 조병갑이라는 더럽고 탐욕스러운 지방관리, 중앙권력 비호를 받는 탐관오리 개인 비리가 떡하니 앉아 있다. 일개 관리 비리가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한 사건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