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를 산 한국인이라면 뇌리에 각인된 장면이 있다. 새로 깔린 전국의 도로를 메운 경쾌한 직선미의 자동차. 흑백 화면 같던 전쟁의 폐허를 딛고 허리띠를 졸라맨 나라의 경제 성장이, 마침내 내 가족의 알록달록한 행복과 활기로 치환되고 있다는 실감. 막 태동한 중산층 가정마다 가족사진 배경으로 내세운 재산 1호. 바로 현대차가 만든 첫 국산 자동차 ‘포니(Pony)’다. 포니를 탄생시킨 현장의 주역은 이충구(78) 전...
이 남자는 이름도 얼굴도 없이 2년을 살았다. 공익 제보자 A라는 익명으로 불렸다. 경기도청에서 일한 그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아내 김혜경씨의 법인 카드(법카) 불법 사용과 불법 의전을 세상에 알린 2021년 겨울부터 사실상 도망자 신세였다. 공익 제보자 A는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마침내 정체를 드러냈다. 조명현, 1978년생이었다. “그들이 하마터면 대통령이 되고 영부인이 될 뻔했다. 잘못한 사람들은 멀쩡한데 나는 왜 이렇게 ...

“엄마! 김밥을 냉동으로 팔아요.” “음, 맛이 나쁘지 않은데?” 지난 8월 한국계 미국인 사라 안(28)이 틱톡과 인스타그램에 올린 이 1분짜리 영상이 그녀의 인생을 바꿨다. 사라 안은 미국 식료품 체인 트레이더 조(Trader Joe’s)를 방문했다가 산 냉동 김밥을 데워 시식하는 장면을 뚝딱 만들어 업로드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영상이 틱톡에서 1340만, 인스타그램에서 865만 조회 수를 기록하며 북미 대륙에 진동을 일...

양궁계의 이단아. 서른두 살의 평범한 직장인이자 두 아이 아빠가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가 되기까지 그는 포기를 몰랐다. 주변 그 누구도 상상 못 한 일이었다. 주재훈 선수는 활을 잡은 지 7년 만에 가슴에 태극 마크를 달았다. 그리고 처음 출전한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 두 개를 목에 걸었다. “그냥 너무 재밌었어요. 처음엔 호기심에 국가 대표에 도전했는데 매번 1, 2점 차이로 떨어지니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버려진 축...

우르릉 쾅쾅! 땅속에서 천둥소리가 났다. 지난해 10월 26일 경북 봉화의 한 아연 광산. 수직 갱도가 붕괴돼 광부 두 명이 지하 190m에 갇혔다. 63빌딩쯤 되는 깊이다. 사흘 뒤 서울 이태원에서 핼러윈 압사 사고가 일어났고 11월 5일까지 ‘국가 애도 기간’이 선포됐다. 온 나라가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던 그때 기적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두 광부가 매몰 221시간 만에 구조된 것이다. “안동병원에서 퇴원하고 봉화소방서부...

“지금 압록강 물은 어때요?” 비가 와서 강물이 불었다는 현지 브로커의 대답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그럼 애가 위험한데…. 거기 군대들이랑 얘기 된 거죠?” 소년 한 명이 국경을 넘어 백두산 인근에 도착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먼저 탈북한 소년의 어머니가 김성은(58·갈렙선교회) 목사에게 북한에 남아 있는 아들의 구출을 부탁한 것이다. 가장 가까운 나라, 그러나 가장 먼 나라. 북한을 빠져나와 공산국가인 중국~베트남~라오스...

이 남자, 찡그리는 법이 없다. 모든 게 감사하다고, 사는 게 너무 즐겁다고 한다. 열 살 때 왼쪽 다리를 잃었다. 게다가 고아다. 그런데 그는 오늘도 천연덕스럽게 웃는다. 외다리 찹쌀떡 장수 최영민(48)씨 이야기는 7년 전 TV 프로그램으로 알려졌다. 30kg이 넘는 떡통을 메고 벼락같이 달리는 모습도 경이롭지만, 목발에 기대 온몸으로 공을 차고 완벽하게 착지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을 숙연케 했다. 그의 영상이 몇 달 전 유...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성악가 연광철(58)에게 올해는 특별하다. 최고의 무대에서 독일어나 이탈리아어로 노래하며 성공한 이 오페라 가수가 한국 가곡을 담은 첫 음반 ‘고향의 봄‘을 내기 때문이다. 모국어로 돌아오는 셈이다. 김소월 시 ‘진달래꽃’(김순남 작곡), 김동명 시 ‘내 마음’(김동진 작곡), 한명희 시 ‘비목’(장일남 작곡) 등 18곡을 연광철만의 따스하면서도 웅장한 저음(低音)으로 들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세종대왕...

정치인 중에 머리 하얀 사람 있잖아, 하면 이 남자가 떠오를 것이다. 히트곡 ‘화개장터’를 작사한 그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이라는 노랫말처럼 살고 있다.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김한길(70) 전 민주당 대표는 윤석열 정부로 건너와 국정 과제 1순위를 맡았다. 국민 통합. 날마다 와장창 소리가 들리는 한국 사회에서 아득한 난제를 붙잡고 있는 셈이다. “‘화개장터’가 사랑받은 까닭...

괴짜다. 여름의 끝자락이지만 여전히 30도를 찍는 날씨인데 검은색 터틀넥 위에 체크 재킷까지 걸치고 나왔다. “스티브 잡스보다 내가 먼저 이렇게 입었어요. 하하.” 차병원의 차광렬(70) 연구소장이다. 산부인과 의사이자 차병원그룹 회장이지만 연구소장이라는 직함을 더 좋아한다. 이런 특출난 고집과 생각이 그를 연구로 이끌었다. 지금도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을 연구 미팅에 쓴다는 차 소장을 지난 11일 경기 분당 차바이오컴플렉스에...

영화 ‘트랜스포머’에 나올 법한 대형 트럭이 천천히 후진하며 공장을 빠져나왔다. 궁둥이에 ‘충북80아XXXX’ 번호판부터 보였다. 적재함은 덮개를 날개처럼 여닫을 수 있었다. 그 14t 화물차 운전석 문이 열리고 마침내 ‘오송 지하차도 의인(義人)’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달 30일 인천 북항 근처 화물차 전문 시공 업체에서 만난 유병조(44)씨는 수척해 보였다. 힘을 다 써버린 영웅처럼, 악수할 때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

한때 ‘지루한 앨’로 불린 남자는 탁월한 강연가가 돼 있었다. 어쩌다 미국 대선에서 졌는지 의아할 만한 솜씨였다. 영상과 통계를 적재적소에 끌어들이며 명쾌한 메시지로 청중을 장악했다. 앨 고어(75)는 “기후 위기 앞에 우리에겐 ‘변화해야만 할까?’ ‘변화할 수 있을까?’ ‘변화할 것인가?’ 등 3가지 질문이 남아 있다”며 말을 이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예스’, 우리는 변화해야만 합니다. 지구의 경고를 무시하고 ...

“우리나라는 학연·지연을 비롯해 이른바 ‘끼리끼리 문화’가 있잖아요. 그런데 재외동포를 선수단장으로 뽑다니,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특히 체육계는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한 분야예요. 저를 선임한 배경에는 ‘이제 새롭게 시작하자’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 달 23일부터 중국 항저우에서 열리는 제19회 아시안게임은 개막하기도 전에 특별한 기록을 남겼다. 역대 최초로 재외동포가 대한민국 선수단장을...

1979년생, 172.5㎝, 압도적으로 작은 얼굴, ‘아는 여자’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모범 납세자, 강원도 정선 밀밭에서 작은 결혼식, 남편은 배우 원빈. 이나영의 프로필이다. 구설 한 번 없었고 소셜미디어(SNS)도 안 하며 여전히 신비로운 이 여배우가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로 돌아왔다. ‘로맨스는 별책부록’ 이후 4년 만이다. 웨이브 시리즈 ‘박하경 여행기’는 고교 국어 교사 박하경(이나영)이 사라져 버리고 싶을 때...

엄마는 양공주였다. 부산 어느 기지촌에서 청춘을 보냈다. 이름은 군자(1941~2008). 사회학자인 딸 그레이스 조(Grace M Cho)는 엄마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6·25전쟁, 가족 상실, 굶주림, 미군 기지촌, 혼혈아 출산, 미국 이민, 사회적 죽음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몸과 정신에 진열해 놓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 조는 미국 브라운대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에서 교육학 석사를 받았고 현재는 뉴욕시립대 사...

‘일요일의 남자’ 송해는 “키가 작아 누구를 만나든 내려다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전국노래자랑 무대에 세 살 꼬마가 올라오면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맞췄다. 그는 그렇게 전국노래자랑을 34년 동안 지킨 ‘작은 거인’이었다. 송해 1주기를 맞은 지난 6월의 어느 날, 서울 광화문에서 김신영(40)을 만났다. 송해의 실로폰을 물려받은 후임자는 더 왜소했다. 그녀의 키는 153㎝. 송해(162㎝)보다 9㎝ 더 작다. 송해의 빈자리에 ...

“약관의 이만기(경남대)가 ‘장사의 천하’를 통일, 스포츠 단일 대회 개인 경기 상금 사상 최고인 1700만원을 거머쥐었다. ‘떠오르는 해’ 이만기가 마침내 홍현욱·이준희의 양대 산맥을 허물고 국내 씨름의 새 질서를 낳았다. 그것은 분명 씨름계의 쿠데타였다.” 1983년 4월 1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는 대이변이 일어났다. 스무 살 대학생 이만기가 혜성처럼 나타나 한라장사 최욱진을 누르고 초대 천하장사 타이틀을 차지한 것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민주당 내 몇 안 되는 소신파 김해영(47) 전 최고위원은 인터뷰 내내 “정치를 10년 하는 동안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 건 처음”이라고 했다. ‘미스터 쓴소리’란 별명을 가진 그였지만, “국회의원 4년 동안은 절제된 발언을 하려고 애썼다”고 했다. 페이스북에 민주당을 향해 뼈아픈 말을 가끔 써왔으나 인터뷰는 마다해왔다. 그런 그가 내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 돈 봉투 ...

“난 지미 페이지 같은 기타리스트가 되겠어!” 열세 살 이적이 일기장에 적었다. 대학가요제에 기타리스트로 출전한 사촌형이 부러웠다. 수련회에서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오르자 여학생들이 처음으로 관심을 건넸다. ‘음악만이 살길이구나.’ 고2 올라갈 무렵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음악을 해야 해요. 그런데 전 세계 제 또래 뮤지션들은 지금 국·영·수를 붙잡고 있지는 않을 거예요.” “알겠다. 그런데 대학은 갔으면 좋겠구나!” 19...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가 해양 방류 초읽기에 들어갔다. 도쿄전력은 방류 설비를 시운전하면서 작동에 문제가 없는지 점검하고 있다. 방사선은 눈에 보이지 않고 느낄 수도 없다. 광우병이나 사드 전자파처럼, 무지(無知)가 공포를 키운다. ‘오염수 괴담’이 횡행하는 가운데, 한 과학자가 이달 초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공개 게시판에 올린 글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처리된 후쿠시마 오염수를 가져오면 방류 농도로 희석해서...

대통령 이름을 소개하는 건 시간 낭비일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뽀로로. 어린이들의 대통령, 그래서 ‘뽀통령’으로 불리는 이 꼬마 펭귄 캐릭터가 올해로 탄생 20년을 맞았다. 2003년 6월 19일, EBS에서 처음 방송 전파를 탔다. 젖병을 갓 뗀, 전국 모든 유아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여진은 지금도 이어진다.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드러누워 생떼 쓰던 아이마저 벌떡 일어서게 하는, ...

불펜에서는 최고의 클로저(closer)가 몸을 풀고 있었다. 현충일이던 지난 6일 삼성이 NC와 벌인 대구 홈경기. 삼성이 3점을 앞선 채 9회초가 되자 마운드에 오승환(41)이 올라왔다. 한미일 리그 통산 500번째 세이브라는 대기록까지 아웃카운트 3개가 남았다. 세이브(save)는 팀의 승리를 지키는 마무리투수에게 주어지는 기록이다. 오승환은 첫 타자를 안타로 출루시키며 불안하게 출발했지만 이어진 상대 타선을 직선타 아웃,...

노병(老兵)은 자나깨나 나라 걱정뿐이다. 구순을 바라보지만 마음에는 주름이 없다. 6·25에 참전하고 군인의 꿈을 꾸던 유년 시절의 신념을 간직하고 있다. 민병돈(88) 전 장군은 1989년 3월 육군사관학교장 시절 “북한은 우리의 적”이라며 노태우 대통령 앞에서 북방정책을 비판하고 옷을 벗은 ‘진짜 군인’으로 기억된다. 정전협정 70주년이자 호국 보훈의 달을 앞둔 지난달 29일 서울 목동 자택. 몇 주 전 만날 약속을 정하면...

이 남자는 독설가다. 좌든 우든 인정사정없다. 한때 친구였던 조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까웠기 때문에 더 신랄했다. 진중권(60)은 “내 생각을 부정하면서까지 누구 편을 든다면 살 이유가 없는 것”이라며 “원칙을 지킨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진중권은 1998년 우연한 계기로 논객의 길을 걷게 됐다.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극우세력뿐 아니라 주사파도 벌레 보듯 했다. 거침이 없었고, 모두가 그를 미워했다. 그렇게 논객이란 이름으로...

서울 잠수교가 런웨이로 변신했다. 지난달 29일 밤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이 연 국내 첫 패션쇼. 산울림의 ‘아니 벌써’가 울려 퍼지자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배우 정호연이 모델 출신다운 워킹으로 등장했다. 루이비통 측은 “한강은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상징적인 장소”라고 했다. 16일엔 다른 명품 브랜드 구찌가 경복궁 근정전을 패션쇼 무대로 삼았다. 두 이벤트는 유튜브 등 온라인으로 세계에 중계됐다. 지난 14일 세...

영어로 give and take, 한국어로는 주고받기. 서로 번갈아 가진 것을 내어주는 오랜 미풍양속. 이청자(82)씨는 30년 넘게 주한미군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부모 없이 거리에 나앉은 아홉 살 꼬마에게 내밀어 준 손길”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 장병에게 구조돼 영어를 익힌 이씨는 “페이백(pay back)하는 심정으로” 1992년부터 ‘캠프 롱’ ‘캠프 페이지’ ‘캠프 이글’ 등 전국의 미군 기지를 돌...

기획재정부에는 여성 차관보, 여성 차관, 여성 장관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여성 국장도 없었다. 김경희(54) 개발금융국장은 이곳에서 금녀(禁女)의 벽을 연파하고 있다. 사무관, 서기관, 과장, 부이사관, 심의관, 국장까지 ‘여성 최초’ 타이틀만 여섯 번째다. 2017년 복권위원회 사무처장이 됐을 때는 기재부 신설 68년 만에 첫 여성 국장 탄생이었다. 지난 1일 밤 10시,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가 열리고 있는 인...

통창으로 봄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마주 앉은 남자는 친숙하면서도 낯설어 보였다. 폭설처럼 머리에 내린 백발 때문이었다. 웃을 때 얼굴에 밭고랑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주름들은 영락없는 배우 안성기(71)였다. 혈액암 투병 중인 그는 반년 전만 해도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민머리였다. 하지만 며칠 전 제4회 ‘4·19 민주평화상’ 시상식엔 백발로 참석했다. 서울대 문리대 총동창회가 수여하는 이 상을 영화 배우가 받기는 처음. 안...

조명이 꺼진 어둑한 복도에서도 물리학자 임지순(72)의 연구실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입구에 헝클어진 머리의 아인슈타인 사진이 담긴 높이 1m의 대형 액자가 서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또 다른 아인슈타인이 보였다. 화학식과 수학 계산이 휘갈겨진 칠판, 논문 서류·전공 서적 더미가 쌓인 책상 사이로 1970년대 장발 스타일의 임지순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점심 먹고 잠깐 잡니다. 꿈에서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도는 모습...

“라면 먹고 갈래?” 이 말에 담긴 구애(求愛)의 속뜻을 모르면, 한국인을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 “넷플릭스 보고 갈래?”(미국)보다 정겹고 “가려운데 좀 긁어줄래?”(홍콩)보다 간접적이며 “새벽에 같이 커피 마실래?”(일본)보다 푸근한 사랑의 대사. 양은 냄비에서 목구멍을 지나 비로소 한국인의 몸과 마음의 일부가 된 라면. 라면만큼 우리를 살 찌운 소울 푸드가 있으랴. 라면을 부숴서 과자로도 먹는 유일한 민족 아니던가. 라...

2017년 10월, 새 보건소장을 찾던 경남 창원시에 뜻밖의 인물이 이력서를 보내왔다. 이력이 화려했다. ‘삼성서울병원장, 삼성의료원장, 대한소화기학회장, 성균관대 의무부총장,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장….’ 지역 보건소에 지원하는 의사가 거의 없다시피 하는 마당에 그의 ‘스펙’은 황송한 수준이었다. 시 공무원들을 깜짝 놀라게 한 주인공은 의사 이종철이었다. 이듬해 초 창원보건소장으로 임명됐다. 그의 나이 일흔이었다....

“다음은 여러분의 입학을 축하하는 무대입니다. 우리 대학 남성교수중창단의 축가가 있겠습니다.” 지난 2월 24일 서울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2023학번 입학식. 사회를 맡은 이명휘 교무처장이 소개를 마치자 정장에 빨간 넥타이를 맨 40~60대 9인조 ‘보이 그룹’이 신입생 3000여 명 앞에 등장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에 이어 이문세가 2010년 발표하고 2021년 임영웅이 리메이크한 ‘사랑은 늘 도망가...

60년 아나운서 외길을 어떻게 걸었느냐 묻는 이에게 김동건(85)은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로 답한다. 러시아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솔제니친의 출세작으로,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온 지 8년이 된 이반이 새벽 5시에 기상해 취침할 때까지의 하루를 시시콜콜 묘사한 소설이다. “이반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온도계가 영하 40도 아래로 내려갔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요. 40도 아래로 떨어지면 그날 작업이 취소되...

IMF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어느 날, 영문학자 최병현은 퇴근길 꽉 막힌 도로에 갇혀 있었다. 라디오를 켜니 난데없는 설전이 흘러나왔다.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와 모 야당 인사가 외환위기의 원인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서로 네 탓 내 탓 하는 걸 들으니, 그의 머릿속에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쓴 ‘징비록’이 떠올랐다. “400년 전 임진왜란 때도 적과 싸우기도 전에 동인과 서인이 다투면서 책임 공방을 ...

하버드대에서 도시계획과 부동산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김경민(51) 서울대 교수는 대한민국을 두 번 놀라게 했다. 코레일과 서울시가 ‘단군 이래 최대 개발 프로젝트’라며 밀어붙이던 31조 규모의 용산국제업무지구에 ‘파산’을 경고한 것이 그 첫째다. “시장에 대한 과학적 분석 없이 ‘한국판 롯폰기 힐’ 같은 피상적 구호에 함몰된 대형 개발에 머지않아 큰 파고가 닥칠 것이란 두려움”에 펴낸 <도시 개발, 길을 잃다>...

따뜻한 온돌 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잠시 기다리자 창호문이 양옆으로 열리더니 교자상이 들어왔다. 불향 그윽한 떡갈비와 매콤한 낙지볶음, 짭조름한 보리굴비, 톡 쏘는 맛이 일품인 갓김치, 구수한 배추된장국, 남도(南道) 밥상에 빠질 수 없는 각종 젓갈 등 그야말로 상다리가 휘도록 들어찬 상이었다. 교자상을 맞든 전남 해남 ‘천일식당’ 오현화(64) 대표와 서울 ‘해남천일관’ 이화영(57) 대표는 “서울사람 입에 맞을지 모르겠...

“가자, 책방으로!” 2004년 어느 여름날. 대구 반야월에 살던 세 모자(母子)는 자전거를 타고 서점으로 향했다. 생활보호대상자로 넉넉하지 않았던 형편의 그들에게 서점은 유일한 놀이터였다. 시원한 에어컨, 가득 찬 책들. 책을 보다 출출해지면 몰래 구석으로 가 준비해온 볶음밥 한 통을 나눠 먹었다. 서점 문이 닫히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따라 달릴 때 얼굴에 닿던 바람은 시원하고 행복했다. 그로부터 20년. 홀로 두 ...

“김 중위, 폭탄 10발을 갖고 가서 문산철교를 폭파시키고 오라!” 1950년 6월 27일 오전 10시. 김두만 공군 중위가 T-6 훈련기를 몰고 여의도 기지를 이륙했다. 비행기 날개 밑에 폭탄 걸이를 장착하고, 15㎏짜리 소형 폭탄 10발을 매단 채였다. 6·25전쟁 발발 사흘째. 그에게 부여된 첫 임무였다. 날이 좋지 않았다. 1500피트 상공에서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항공기가 균형을 잃고 회전하며 곤두박질쳤다. 조...

“남자 이름이 왜 이길여야?” 1951년 전북 전주 전시연합대학 정문에 붙은 합격자 방(榜)을 보고 사람들이 쑥덕거렸다. 6·25 전쟁으로 대학 수업이 어려워지자 문교부(현 교육부)는 각 피란지에서 교수와 학생이 연합대학을 형성해 교육받을 수 있게 했다. 후방인 부산·광주·전주 등에 전시연합대학이 세워졌다. 여기에 속했던 서울대도 ‘방’을 붙여 신입생을 발표했다. 사람들은 여자가 서울 의대에 합격했다가 아니라, 서울 의대에 합...

강원도 양구 해안분지는 ‘펀치볼(Punchbowl)’로 더 유명하다. 6·25전쟁 당시 종군기자들이 “이곳 지형이 넓고 우묵한 화채 그릇(펀치볼) 같다”며 붙여준 별명이다. 이 화채 그릇에 7년 전 사과 농장 하나가 들어섰다. 휴전선에서 불과 5km 떨어진 북위 38도17분13초에 위치한 대한민국 최북단 사과밭이자, 축구장 25개를 합친 것보다 넓은 6만평(19만8347㎡) 면적에 사과나무 1만5100그루를 심은 국내 최대 규...

“‘못난이 김치’는 김치만은 우리 것을 먹자는 ‘김장 의병 운동’이자, 버려지는 농산물을 도시 사람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하는 ‘못난이 컬리’입니다. 생긴 건 못났지만, 맛은 정말 잘났답니다, 하하!” 도지사인가, 장사꾼인가. 현란한 말솜씨에 감탄하던 찰나, 그가 자못 진지해졌다. 대뜸 “날 비호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말도 많고 뺀들뺀들해서.”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튀지 않고는 ...

2005년 10월 2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소속 마흔다섯 살 선지훈 신부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머리 위 선반에 가방을 조심스럽게 올려 놓은 그는 비행 11시간 내내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수시로 선반을 올려다보는 얼굴엔 긴장이 역력했다. ‘조금만 참으면 서울이다···’. 이윽고 29일 오전 11시 30분. 비행기가 인천공항 활주로에 닿았다. 신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선 후기 대표 ...

이금희(57)는 과거 자신이 진행한 KBS ‘아침마당’에서 만난 노부부에게서 말하기의 핵심을 배웠다고 했다. 예순 넘어 배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무학(無學)의 아내와 그를 도운 남편의 사연이었다. 남편은 중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했지만 아내는 집안 사정으로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아내는 낮에 김매고 밭을 일구면서 영어 단어를 중얼거렸다. 시험 기간이면 밤 늦게까지 공부하기 위해 냉커피를 한 사발씩 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