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과 아주 가까워졌다. 한국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칠레 산티아고를 거쳐 2만800km의 거리를 꼬박 이틀이나 날아왔다. 나의 작은 방으로부터 광활한 남극까지 가 닿는 일은 내가 바라본 가장 먼 곳을 향한 여정이다. 긴 비행. 꿈과 나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던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처럼 묘한 기분이 든다.

2024년 11월 2일 예정됐던 남극행 항공편이 지연되고 사흘째 되던 날 칠레 푼타아레나스 바닷가를 산책하다 우연히 만난 킹펭귄 세 마리. /김영미 제공

남극 탐험은 극한의 육체적인 활동이라 생각과 행동이 일치할 수 있는 인생의 시간이 제한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것에 마음을 쏟는 일을 이쯤에서 그만둘까?’라는 고민도 여러 번 했다. 시작할 때의 마음과 다르게 시간이 더해져 갈수록 꿈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에 다시 돌아온 것은 내 인생에서 ‘큰 사건’이다.

2024년 10월 28일. 남극으로 가는 첫 관문인 칠레 최남단의 중심 도시 푼타아레나스(푼타)에 도착하니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마젤란해협을 관통해 온 거센 바람으로부터 남극 블리자드의 위력이 느껴진다. 한국에서 예약해 둔 택시에 스키 가방을 싣고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하던 중 비가 그쳤다. 바다 위로 선명한 무지개가 거창한 환영 인사를 해준다. “우와~!” 탄성이 절로 나왔다. 끝에서 끝이 반타원형으로 연결된 무지개 다리는 처음 보는 풍경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연출할 수 없는 신비로운 대자연의 현상들, 좋은 징조. 기분 좋은 출발이다. 40여 시간의 장거리 비행으로 꾀죄죄해진 행색 위에 무지갯빛이 쏟아지고 안면 근육과 마음의 긴장이 말랑해졌다. 일곱 빛깔의 무지개처럼 시작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결말이기를 기도했다. 이제야 설렘과 두려움을 오가며 공존하던 떨림 사이에서 ‘설렘’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리는 것 같다.

푼타까지 다큐팀 두 명과 산악부 후배 슬비가 함께 왔다. 슬비는 “남극으로 떠나는 여정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다”며 다니던 회사 복직을 앞두고 육아 휴직 1개월을 연장했다. 남극 대륙은 나 혼자 걷지만 두 후배 슬비와 송희는 어엿한 팀으로 훈련과 준비 과정에 든든한 지원군이 돼줬다. 슬비가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 숙소에 짐을 풀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남극 항공편 물류 대행사 사무실로 갔다. 오전 내내 남극에서 사용할 위성 장비 테스트와 내가 걷게 될 1700여km의 위험 지역을 구간별로 재점검했다.

남극행 항공편은 11월 2일 출발. 10월 31일까지 짐 먼저 체크인해야 했다. 하지만 짐 때문에 마음을 졸였다. 2년 전엔 한국에서 짐이 2주 만에 왔는데, 이번에는 한 달 전에 부친 짐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관처럼 생긴 썰매가 담긴 나무 상자 때문에 짐 부피가 크기도 했지만 칠레 국내 항공화물 연결편에 차질이 생기면서 육로를 통해 트럭으로 옮기는 바람에 10월 30일 가까스로 푼타에 도착했다. 3명의 지원군과 함께 밤늦게 재포장 작업을 겨우 마쳤다. 일정의 변수가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짐 싸는 게 복잡하다 해도 썰매에 100kg만 채운다고 생각하면 계산이 단순해진다. 옷에 붙은 라벨을 잘라 1g 이하 무게까지 도려냈다. “한 줌 24g의 견과류를 먹을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재포장이 끝나고 다큐팀도 한국으로 돌아갔다. 바뀐 밤낮의 시차는 적응되지 않았다. 기상 상황 때문에 남극행 비행기는 제날 뜨지 못했다. 덕분에 러닝도 하고 밀린 잠도 푹 잤다. 사실, 2년 전엔 푼타에서만 2주를 대기했다. 항공편이 지연되고 사흘째 되던 날 오후 바닷가를 산책하다 무리에서 이탈해 길을 잃고 해변을 어슬렁거리는 킹펭귄 세 마리를 만났다.

“남극에서 어서 오라고 펭귄 사절단을 보냈나 봐요.”

“어쩌면 내일 남극으로 들어갈 것만 같아!”

우리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무지개부터 펭귄까지 이어진 행운의 시그널에 응답받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

※한국인 최초로 남극 대륙을 단독 횡단한 산악인 김영미의 ‘남극, 끝까지 한 걸음’을 격주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