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지난 12월 31일 밤 11시 58분. 중고 거래 앱에 빵빵한 비닐봉지 사진과 의미심장한 글이 올라왔다. “2024년의 마지막 공기 팝니다!”
얼씨구. 가격은 180만원, 소비 기한 2034년 12월 31일. “저녁 겨울 공기라 신선하다”며 “네고(흥정)는 안 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글이 하나가 아니다. “올해의 마지막 공기.” “감히 가치를 환산할 수 없다. 싸게 팔겠다.” 지난해 공기는 앞으로 영원히 맡을 수 없을 텐데, 진정한 한정판?
“신선한 공기 팝니다~”라는 글이 농담이 아닌 시대가 왔다. 넷플릭스 ‘오징어게임2’에 등장한 공기놀이 말고, 무색무취의 바로 그 공기(空氣). 최근 중고 거래 앱에 올라온 ‘공기 판매 글’은 현대판 봉이 김선달들의 새해맞이 유쾌한 농~담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공기는 이미 팔리고 있다. 누가, 왜 살까?
◇공연장 공기 9500만원
“무대랑 가까운 VIP석 7열에서 담은 공기. 10만원.” 작년 8월, 경기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래퍼 칸예 웨스트의 리스닝 파티에 참석한 관객이 “공기 팝니다”라며 이런 글을 올렸다. 품절이라 못 샀던 ‘허니버터칩’ 대란 당시 “냄새라도 맡겠다”며 빈 봉지를 500원에 사고팔던 모습이 떠오른다(그건 진짜 고소한 냄새가 나기라도 하지).
신뢰가 없다면 거래도 없다. 콘서트장 공기인지 본인 집 화장실 공기인지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1층 E4구역 7열이라 적힌 입장권 사진까지 인증한다. 일부 아이돌 팬 사이에서는 ‘BTS 콘서트장 공기’ 등의 이름으로 암암리에 거래가 이뤄진다고.
칸예 웨스트 콘서트장 공기는 실제로 2015년 3월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 올라와 화제가 됐다. 당시 5달러에서 시작된 경매가는 6만5000달러(약 9500만원)까지 치솟았다. 비슷한 일은 2017년 3월, 가수 아델 콘서트 직후에도 있었다. 약 1500달러(약 220만원)까지 경매가가 올랐다고. 물론 보다 못한 이베이는 ‘공기 판매’ 경매를 중단시켰다.
◇신선한 100% 진짜 공기
“나 참. 이러다 물도 돈 주고 사 먹겠다.” 우리는 과거에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돈 주고 사 먹는 물’이 어색하지 않다. 생수 판매가 완전 합법이 된 건 1995년. 이전까지는 경우에 따라 생수 판매를 단속했다. 30년이 흐른 지금 설마 했던 공기마저 상품화하고 있다. 다행히 아직은 관광 기념품이나 호기심으로 사는 이들이 대부분.
작년 11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주의 빙하 호수인 코모 호수에서 ‘현지의 신선한 100% 진짜 공기’ 상품이 등장했다(가짜 공기는 또 뭘까). 용량은 400mL, 가격은 9.9유로(약 1만5000원). 이탈리아 마케팅 업체가 내놓은 제품인데 “코모 호수의 한 조각을 가지고 가라”고 홍보한다.
관광객은 각자의 의미를 담아 일명 ‘공기 통조림’을 구매한다. “보이진 않지만 만질 수 있는 추억” “코끝에 아른거리는 기억”이라는 것. 냄새가 향수를 자극하기 때문일까. 영국의 한 업체는 “타지의 영국인에게 고향의 향을 선물하겠다”며 런던이나 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 공기를 캔에 담아 판다. ‘런던 공기’ 제품은 375mL에 11.99유로(약 1만8000원)다. 버킹엄 궁전(20%), 빅 벤(20%), 피커딜리서커스(10%), 런던 지하철(10%) 등의 공기를 혼합했단다. 물론 캔 형식으로 일단 뚜껑을 열면 끝. 서울 공기 제품은 없나?
◇국내 반응 아직은 그닥
미세 먼지 등 공기 오염 때문에 ‘밑져야 본전’이란 마음으로 상품을 구매하는 서글픈 사례도 있다. CNN 등 외신에 따르면 사상 최악의 미세 먼지로 베이징의 학교가 폐쇄되고 교통이 제한되기도 했던 2015년 중국에서는 캐나다 로키 산맥의 공기 7.7L를 담은 1만8000원짜리 공기 캔 상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다만 “공기 한 병으로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 외신을 비롯한 전문가 중론.
국내에도 공기 캔은 등장하고 있다. 경남 하동군은 지리산 해발 700~800m에서 포집한 공기 8L를 담은 공기 캔 ‘지리 에어(JIRI AIR)’를 2017년 상품화했다. 1초씩 160번 마실 수 있는 분량으로, 뚜껑 속 내장된 마스크를 꺼내 코에 대고 흡입한다. 하동군은 “호흡 곤란이나 멀미 증세가 있으면 이용하시라”며 시외버스 등에 비치하기도 했다. 제주에서도 공기 캔 개발이 진행 중이다.
아직 국내에서는 “공기를 누가 돈 주고 사느냐”는 반응이 지배적. 제주보건환경연구원은 2003년 기업과 손 잡고 한라산국립공원 내 해발 700m 오름 공기 캔 0.5L를 3000원에 팔기 시작했지만 몇 년 만에 고배를 마시고 사업을 중단했다. 비상 상황 등을 대비해 식약처 인증을 받은 산소 캔 혹은 공기 캔을 구비하거나 등산·운동, 기분 전환을 위해 사는 경우는 있어도 아직 널리 사용되긴 어려운 셈.
“△△수(水)는 좀 비리고 OO수는 깔끔해.” 물을 누가 돈 주고 먹느냐던 우린 이제 물 맛을 비교한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에어는 좀 텁텁하고 OO에어는 상큼해”라며 공기 캔 맛(?)을 품평하는 날도 닥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