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베트남 호찌민시 한 대형마트. 어린아이 손을 잡은 여성이 한글로 ‘아침햇살’이라고 적힌 음료를 집어들었다. 베트남에서 아침햇살은 코코넛 밀크에 녹두나 팥, 젤리를 섞어 먹는 전통 디저트 ‘쩨’처럼 은은한 단맛을 내면서 쌀을 이용해 건강 음료로 통한다. 1.5L 페트 한 병 가격은 7만5000동(약 4100원)으로 비싼 편이지만 작년 수출 물량의 85%가 베트남으로 향했다.

웅진식품이 아침햇살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쌀은 연간 1830t. 밥공기(90g) 기준으로 2033만3000그릇 분량이다. 웅진식품 관계자는 “국내산 쌀로 만든 제품을 수출한다. 전체 생산량의 45%”라고 했다. 그 인기에 국내 기업인 OKF는 라이스 밀크(rice milk)를, 베트남 기업인 TH는 트루 라이스(true rice) 같은 유사 상품을 내놓았다.

‘흰 쌀밥에 고기 반찬’이 최고로 여겨지던 시대가 지나고, 쌀로 음료와 빵을 만든다. 그래도 쌀은 남아돈다. 밥심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한국인의 쌀 소비량이 줄었기 때문. 작년 우리 국민 1인의 연간 쌀 소비량은 56.4kg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30년 전인 1993년(110.2kg)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1인당 하루에 소비하는 쌀은 한 공기 반(154.6g)에 불과하다. 면과 빵, 혹은 샐러드 같은 채소류로 입맛이 바뀐 탓이다.

베트남 호찌민시의 한 대형 마트에서 ‘아침햇살’을 구매하는 사람들. 국내 쌀로 만드는 아침햇살은 작년 생산량의 45%를 수출했다./웅진식품

◇넘치는 쌀, 부족한 밀·콩

쌀이 남아도는 요인은 다양하다. 먹는 사람은 줄어드는데, 생산량은 줄지 않는다. 2019년 374만4000t이던 쌀 생산량은 2021년 388만2000t으로 늘어났다가 2023년 370만2000t이었다. 남아도는 쌀은 정부가 매입한다. 그 쌀을 전국 3436동의 창고에 보관하다가 저소득층이나 취약 계층에게 정부 양곡으로 판매한다. 작년에만 쌀 매입비에 9916억원을 썼고, 보관하는 비용은 2019년 905억원에서 작년 1187억원까지 상승했다. 쌀 매입과 보관에 1조원을 쓰는 셈이다. 비싼 돈 주고 매입한 쌀을 사료용으로 헐값에 판다. 그래도 추수철이 다가오면 “쌀을 보관할 공간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고령화된 농촌에서 벼농사를 선호하는 것이 벼 재배 면적이 줄지 않는 이유다. 현재 전체 경지 면적의 46%에서 벼를 재배한다. 벼농사의 경우 기계화율이 99%이지만 밭농사는 63.3%에 불과하다. 밭에 직접 작물을 심고 거두는 단계에서는 기계화율이 각각 12.6%, 32.4%로 크게 떨어진다. 농사를 짓는 농업인의 59.1%는 65세 이상. 노동력을 투입해야 하는 밭농사보다 벼농사의 선호도가 클 수밖에 없다.

그래픽=송윤혜

◇특명, 쌀을 소비하라

정부는 밥용 쌀 재배 면적을 다른 작물로 바꾸는 정책을 시행 중이다. 쌀은 넘치지만, 우리나라 곡물 자급률은 20.9%에 불과하다. 밀의 경우 1.3%다. 쌀 자급률이 105%에 육박하는 것과 달리 콩과 밀 같은 곡물은 수입에 의존한다. 농식품부는 벼 재배 농지에 콩 같은 전략 작물을 심을 경우 보조금을 지원하고, 밥용 쌀과 같은 방식으로 재배할 수 있지만 가루로 내어 밀가루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신품종 ‘가루 쌀’ 재배 면적을 늘린다는 계획이다. 작년에만 농지 2000ha를 기존 쌀에서 가루 쌀 재배 면적으로 변경했다. 농식품부는 올해엔 1만ha까지 늘릴 계획이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한 '2024년 가루쌀 제과·제빵 신메뉴 품평회’에서 대상 수상한 ‘솔잎 쌀 무스케이크’. /파르나스호텔

서울 삼성동에 있는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 호텔은 지난달부터 가루 쌀로 만든 빵 14종을 판매하고 있다. 지난 5월 열린 ‘가루 쌀 품평회’에서 대상을 받은 ‘솔잎 쌀 무스 케이크’ 같은 신제품 9종과 기존 밀가루로 만들던 빵 5종을 가루 쌀 제품으로 변경해 판다. 김동우 주방장은 “밀가루보다 물을 더 넉넉히 넣고, 반죽 정도를 조정하는 등 가루 쌀에 맞게 레시피를 변경해 밀가루 빵과 맛의 차이가 없도록 개발했다”고 말했다. 성심당, 김영모과자점, 이성당 같은 전국 유명 빵집 32곳이 ‘빵지 순례’를 열기도 한다.

수요 없는 생산을 막기 위한 쌀 재배 면적 축소, 대체 작물 경작이 추진되고 있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5일 쌀이 초과 생산돼 쌀값 하락이 우려될 때 정부가 남는 쌀을 사들이도록 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이하 양곡법)’을 당론으로 추진한다고 밝혔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대통령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해 본회의에서 폐기됐던 법안이다. 송미령 농식품부 장관이 양곡법을 ‘농업의 미래를 망치는 법(농망법)’이라고 표현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농식품부는 “양곡법이 시행될 경우 2030년에는 쌀 매입비와 보관비로 3조원 이상이 들 것”이라고 발표했다. 보건복지부가 출산·양육으로 인한 소득 감소 보전을 위해 책정한 부모급여 지원 예산이 2조8887억원, 영유아 보육료 지원에 책정한 예산이 2조6731억원이다. 둘 다 3조원이 되지 않는다. 골칫덩이가 된 쌀을 어이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