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말을 다 담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 밝히지 못한다.” 그래서 ‘그림[상·象]’으로 사물의 뜻을 밝히려 하였다(‘주역’). 그림의 존재론적 이유이다. 그렇다고 모든 그림이 사물(세계)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땅을 읽어내려는 풍수학인의 고민도 여기서 시작한다. 그 고민을 전통 산수화가들도 공유하였다. 종병(宗炳·375~443)이 “산수의 정신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한 이래 중국의 역대 화가들은 이 화두를 붙잡고 끊임없이 고민하였다. 산수화와 풍수가 일란성 쌍둥이인 이유이다.

기운생동한 산수화의 정신[神]은 화가·소장자·관람객에게 전해진다[傳]. 이른바 ‘전신(傳神)론’이다. 따라서 산수화는 일종의 의식 형태이다. 풍수에서는 산수의 정신을 ‘형국론(形局論)’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맹호가 숲을 나서는 형국[猛虎出林形]’이니 ‘소가 누워 있는 형국[臥牛形]’이니 하는 말들이 그와 같은 것이다. 분석을 통한 앎이 아닌 총체적 직관을 통해 얻어지는 이미지[상·象]를 얻자는 것이 풍수가 지향하는 바이다. 물질적 땅이 아닌 의미론적 땅으로 다가와야 한다.

그렇다고 글과 말이 그림의 하수라는 뜻은 아니다. 글자도 그림보다 뜻을 총체적으로 더 잘 드러낼 수 있다. 대표적 예가 ‘화홍산수(花紅山水)’이다. 화가 김병종 서울대 명예교수의 핵심 철학이다. 김병종 화가를 따로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진핑 중국 주석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방한했을 때 그의 그림이 증정됐다는 사실로 충분하다.

김병종 화가의 작품 '화홍산수'. 전통적 의미의 산수화는 아니지만 실제로 보면 산수화를 체감할 수 있다. /김병종 화가 제공

‘화홍산수’란 “꽃[花]이 산하[山水]를 붉게 만든다[紅]”는 뜻이다. 꽃나라[화국·花國]는 문화나라[화국·華國]의 다른 이름이다. 1980년대 좌파 진영에서 예술의 ‘당파성’과 ‘민중성’ 논쟁이 치열하였다. ‘예술이 특정 계급·계층에 봉사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잘못이다. ‘화홍산수’는 계층과 계급을 뛰어넘는 보편적·세계적 예술론이다.

유명 화가의 작품들은 쉽게 볼 수 없다. 특별전이 있어야 관람할 수 있고, 비싼 관람료를 치러야 한다. 김병종 화가의 작품들은 그렇지 않다. 남원 광한루 앞 작은 내 저쪽 고개를 넘으면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 있다. 고갯마루 전망 좋은 곳에 터를 잡았다. 지리산이 아련히 보인다. 무료 입장이다. 사람 키보다 더 큰 대작들이 전시된다. 김 교수가 고향 남원에 400점의 그림과 3500권의 책을 기증하면서 만들어진 미술관이다. 그림을 보러 전국에서 사람이 몰린다. 일대 땅값이 들썩이며, 광한루 옆 김병종 고택 활용안도 뜨거운 주제가 되고 있다. 소멸 위기의 지자체들 가운데 생존 가능한 곳이 남원이다. 농축산이 아닌 문화를 통해서다.

남원 함파우 길에 위치한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화홍산수는 특정 그림 제목이 아니다. 연작들을 관통하는 주제어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산수화는 아니다. 그러나 그림을 보면 산수화임을 누구나 안다. 김병종미술관은 필자 주소지 순창에서 차로 20분 거리이다. 빨강 노랑 고채도 그림은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한다(김병종 화가의 그림은 중국에서도 인기이다. 빨강·노랑을 선호하는 중국의 풍수와 통하기 때문이다). 그림 앞에서 어린이들이 골똘히 서 있는 모습도 가끔 본다. 그림의 정신이 어린아이에게 전달되는 순간이다. 그림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붉은색 꽃 한 잎은 기가 드나드는 ‘기구(氣口)’가 된다. ‘생명의 시작’이다.

화홍산수에 늘 “송화분분(松花紛紛)”이 따라다닌다. 송홧가루 날리는 모습을 형상화한 그림들이다. 송홧가루가 날리는 봄날에 필자의 시골집 마루와 장독도 누렇게 된다. 바람이 세게 불면 앞산 송홧가루가 뿌옇게 동네를 가로질러 날아간다. 생명의 대이동이다. 하늘과 땅, 앞산과 뒷산이 교접하는 관능과 몽환의 세상을 만든다.

화홍산수는 지자체를 살리고 문화관광 대국을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