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선수가 일제강점기에 베를린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해방 후 처음 참가한 1948년 런던 대회 이후 1964년 도쿄 그리고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도 경기장에서 애국가를 들을 수 없었다. 어린 학생의 마음에 실망이 대단했는데 당시 왜 그토록 올림픽 금메달에 집착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베를린에 이어서 독일에서 두 번째로 열리는 1972년 뮌헨 대회에서는 반드시 금메달을 들고 오리라 기대했는데 전해온 소식은 참담했다. 대한민국은 유도에서 재일교포 오승립 선수의 은메달 한 개가 전부인 데 반해,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북한 선수단의 이호준이 덜컥 사격 소총복사에서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땄기 때문이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남북한의 자존심 싸움이 절정에 달한 때라 충격이 매우 컸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금메달리스트 이호준의 한마디 말이었다.
“원쑤의 심장을 겨누는 심정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올림픽 정신과 스포츠맨십에 동떨어진 황당한 발언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얼굴이 화끈했다. 남북한 이름의 공통분모 ‘코리아’에 오점이 생긴 것 같아 분하고 창피했다. 우리 측에서는 메달을 박탈해야 한다며 난리가 났다. IOC에서도 지극히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조사에 나섰으나 북한의 사과로 결국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4년 후 마침내 학수고대하던 첫 금메달 소식이 들려왔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가 정상에 우뚝 선 모습이 늠름했다.
이런저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제32회 2020 도쿄 올림픽이 마침내 열렸다. 정식 개막에 앞서 남자 축구 조별 예선전이 열렸는데 참기 어려운 삼복더위를 단방에 날려 줄 모처럼의 볼거리가 생겨 TV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기고 지는 건 항상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비교적 쉬운 상대라고 알려진 뉴질랜드에 통쾌한 승리를 의심치 않았는데 기대와 달리 졸전 끝에 패하고 말았다.
고질병인 골 결정력 부족에 경기 내내 울화통이 터졌는데 다음 날 조간신문 기사가 마음을 더욱 허탈하게 만들었다. 경기가 끝나고 상대가 청하는 악수를 우리나라 선수가 거부했다는 내용이었다. 정정당당하게 경기에 임하고 승패가 결정되면 승자는 패자를 위로하고 패자는 승자를 축하하는 것이 스포츠 정신이라고 배웠는데 어찌 된 일인가. 기사의 제목대로 얼굴을 들 수 없는 못 난 짓이었다. 아직 젊은 선수가 우세한 경기를 승리로 이끌지 못한 자책감에 스스로에 화가 난 것으로 이해해 주려 했지만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속이 상한 나머지 잠시 이성을 잃었다며 나중에 당사자가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했기에 그나마 다행이지만 엎질러진 물이요, 시위를 떠난 살이 아닐 수 없다.
어느 TV 방송사의 개막식 중계방송을 두고도 뒷말이 무성하다. 우크라이나 배경 화면에 체르노빌 원전 참사를, 아이티를 최빈국으로 소개하면서 최근의 폭동을, 루마니아가 입장할 때는 드라큘라를, 마샬군도는 한때 미국의 핵실험장이라는 소개를 내보내 국제적으로 커다란 빈축을 샀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처사로 모든 나라는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소중한 친구라는 생각이 부족한 결과다. 외국에서 대한민국을 소개할 때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붕괴 사진을 사용한다면 우리의 기분이 얼마나 언짢을까.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남자 축구팀이 1차전의 예기치 못한 패배를 만회하고자 루마니아를 상대로 활발한 경기를 펼치고 있었다. 강력하게 상대 골문을 압박하던 중 루마니아 수비수 ‘마린’이 그만 자책골을 넣고 말았다. 물론 우리에게 유리한 결과지만 ‘고마워요. 마린’이라는 자막은 상대방을 조롱하는 행위로 인식됐다. 유명 외국 방송에서도 관심을 보였고 결국 방송 책임자가 공식으로 사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제 망신으로 국격을 떨어트리는 얼빠진 짓에 많은 사람이 끌끌 혀를 찼다.
올림픽 경기에서 양궁은 언제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 이번에도 첫 금메달을 국민에게 안겼다. 혼성단체전에서 어린 두 선수가 시종일관 경기를 주도했는데 고요한 양궁장에서 흔히 보지 못하는 쩌렁쩌렁한 기합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빼어난 실력과 함께 패기가 돋보이는 천재 궁사 김제덕 선수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냉혹한 승부사 기질의 ‘멘탈갑’ 안산 선수가 합작한 명승부였다.
최종 승리를 확인하고 한국 선수와 코치가 뒤엉켜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모두가 흥분해서 부둥켜안고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금메달을 놓친 네덜란드 선수 두 명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잠시 옆에 서서 우리 선수들이 진정되기를 기다린 다음 우승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 TV 카메라에 잡혔다. 우리 선수들도 웃으며 위로의 몸짓을 보였다. 멋진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이겨서가 아니고 패자가 승자에게 먼저 축하의 말을 전하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결승전에서 아깝게 패한 그들의 가슴인들 어찌 쓰리지 않았을까.
네덜란드가 참으로 선진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분명 좋은 나라가 틀림없다. 국격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또 지켜지는 것 아니겠는가.
김동규 서울대 신경외과학 명예교수· ‘마음 놓고 뀌는 방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