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서울 은평구에서 만난 세실리아 강 감독. 그는 아르헨티나 이민 1세대인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첫 장편 영화 ‘장남’으로 작년 스위스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상을 수상했다. /김지호 기자

아르헨티나 이민 2세 세실리아 강(41) 감독은 자신을 “문화적으로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스스로를 “영락없는 아르헨티나인”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어느 나라 출신이냐”고 묻는다. 자아의 충돌에서 비롯되는 복잡한 물음은 곧 그의 영화 출발점이었다. 그의 끊임없는 물음이 담긴 첫 장편 영화 ‘장남(Hijo Mayor·2025년)’으로 그는 작년 스위스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상을 받았다.

새로운 다큐멘터리 촬영차 서울에 온 그를 지난 9일 서울 은평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강 감독은 영화 ‘장남’에 대해 “굉장히 개인적이면서도 어쩌면 보편적인 이야기”라며 “피할 수 없었던, 일종의 이끌림에 의해 만든 것”이라고 했다. 영화는 산업 역군으로 1970~80년대 중동 지역과 파라과이 등을 거쳐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자신의 아버지 이민사(史)를 바탕으로 한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모험’에 나선 아버지 세대의 희망과 좌절, 그리고 이역만리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자식 세대의 혼란을 다룬다. 시나리오 초고를 쓸 때부터 촬영을 마치기까지 총 8년이 걸렸다.

이민자의 삶을 다룬 작품은 많았지만,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자는 분명 낯설다. 그러나 강 감독은 ‘소외감’은 이민 세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는 “학교에서도, 집단에서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겉도는 느낌’이야말로 가장 넓게 공명할 수 있는 감정”이라고 했다.

강 감독은 애초 자신의 가족 이야기가 영화가 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오래 의심했다고 말했다. “왜 우리 가족 이야기가 중요할까, 누가 관심을 가질까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저녁 식탁에서 아버지가 반복해 들려주던 과거의 모험담 때문인지, 아버지의 인생과 자신의 삶이 본질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고 한국과 아르헨티나라는 두 나라의 ‘운명적’ 결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영화 ‘장남’ 포스터. 더 나은 삶을 찾아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한인 가족의 딸 릴라(핑크색 머리 인물)는 두 세계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특히 ‘문화적 이중성’은 강 감독 작품의 가장 강한 동력이다.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스페인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만,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서툴지만 애교 섞인 한국어를 쓰는 전형적인 ‘둘째 딸’이 된다. 고달픈 하루를 달래는 데는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만 한 게 없다면서도, 세계적인 쇠고기 생산국인 아르헨티나의 대표 요리 아사도(asado·고기구이)를 사랑한다. 그에게 ‘한국계 아르헨티나인’이라는 정체성은 이중적이지만,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부모는 자식들을 위해 밤낮없이 일했고, 아홉 살 터울의 언니는 강 감독에게 ‘두 번째 엄마’였다. 많은 한인 2세들이 고수익·명성이 보장되는 전문직을 자연스러운 진로로 받아들였지만, 그는 ‘불안정한 길’을 택했다. 고교 시절 학교에서 우연히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를 보며 영화의 매력에 빠졌다. “이민자의 딸이 갑자기 영화 공부를 하겠다고 하니 부모가 기절할 뻔했다”는 그의 농담 섞인 말에는, 안정이 절실했던 1세대와 도전을 통해 주체적으로 삶의 방향을 정하려는 2세대 사이의 긴장감이 녹아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결국 제가 진짜 행복해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셨어요. (그들은) 바쁘게 사시느라 차마 도전할 수 없었던 일을 제가 즐기고, 원하는 모습을 본 거죠. 저에게는 아주 뭉클한 일입니다.”

지난 9일 서울 은평구에서 만난 세실리아 강 감독. 그는 “거대한 담론을 다루는 영화보다 우리가 인생을 살며 마주하는 여러 진실과 조각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강 감독은 두 나라가 가족 중심적이라는 표면적 유사성보다, 오히려 “정말 정반대에 가깝다”고 말한다. 다만 반대인 사람끼리 끌리는 현상처럼, 서로 너무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 흥미로운 대화와 탐색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예전에는 무지에서 비롯된 작은 인종차별도 겪었지만, 지금의 아르헨티나 젊은 세대는 한국 문화에 훨씬 더 열려 있다”며 “한류와 K드라마, K팝, 음식이 만들어낸 변화 역시 매일 체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강 감독은 “저처럼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축복받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만큼 넓고 여유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기죽지 않고 도전하길 응원한다. “이민 자녀들은 가족이 나를 위해 많이 희생했다는 생각 때문에 더 부담을 느껴요. 하지만 결국 부모는 자식이 행복하게 살길 바랄 뿐이에요. 그러려면 자신이 진짜 원하는 일을 해야 해요. 두려워하지 말고요. 저는 그냥 영화를 만드는 일을 사랑해요. 사는 동안 계속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