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 서울의 귀성객들은 서울역, 용산역 등에서 열차를 타겠지만, 2004년 고속철도인 KTX가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많은 귀성객이 몰리던 곳은 옛 서울역사였답니다. 그런데 옛 서울역의 이름이 ‘남대문역’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오늘은 옛 서울역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볼게요.

◇처음엔 ‘남대문 정거장’이라 불려

서울역이 처음 생긴 것은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900년이었어요. 한 해 전인 1899년,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첫 철도인 경인선이 준공됐고, 이어 한강철교가 완공되면서 한양도성 근처까지 철도가 닿게 됐지요. 하지만 이 철도는 일본과 미국의 기술·자본으로 건설됐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자주권을 크게 침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제가 서울역 17만㎡가 넘는 땅을 철도 부지로 빼앗아갔거든요. 일제가 만든 철도는 한반도에 이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한 대륙 침략의 발판이었던 것입니다.

/그림=김영석

서울역은 처음에 ‘남대문역’이라 불렸습니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서 인력거꾼 김첨지가 한 학생을 비를 맞으며 데려다준 ‘남대문 정거장’이 바로 그곳이죠. 1919년까지 경인선·경부선의 종착역이었던 당시 ‘경성역’은 오늘날 경찰청 앞 큰길 건너편에 있는 ‘서대문역’에 있었어요. 일제가 용산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을 서울 도심에서 탈 수 있게 하려고 철도를 새로 놓아 남대문역까지 연결했고, 이후 서대문역이 없어지면서 남대문역이 새 경성역이 됐습니다.

◇르네상스 양식의 ‘동양 제2역’

옛 서울역사 건물은 3년의 공사 끝에 1925년 완공된 것입니다. 석재·벽돌과 철근콘크리트를 쓴 르네상스 양식의 웅장한 2층 건물로, 규모나 양식 면에서 ‘동양 제1역’이라 불린 일본 도쿄역의 뒤를 잇는 ‘동양 제2역’이었다고 해요.

이상의 소설 ‘날개’에도 등장하는 1층 대합실 옆 찻집과 2층의 호화 레스토랑은 장안의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즐겨 찾던 장소였습니다. 개성으로 꽃구경 가거나 수원으로 달구경 가기 위해 운행된 임시열차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창경원(지금의 창경궁) 벚꽃을 보기 위해 하루 저녁 전국에서 4000여명이 경성역에 도착한 일도 있었습니다.

1945년 남북이 분단된 이후엔 불가능하게 됐지만, 당시만 해도 서울역에서 파리나 모스크바까지 가는 표를 사서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었습니다. 서울역은 동아시아 철도 네트워크의 중심이나 마찬가지였죠. 일본~한반도~만주~유라시아 대륙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철도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국제적인 교통 도시가 서울인 셈이었습니다.

이는 물론 철저히 일본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어요. 지금은 서울에서 부산 가는 열차를 ‘하행선’이라고 하지만, 일제 치하에선 부산에서 서울 가는 열차가 하행선이었습니다. ‘제국의 수도 도쿄에서 식민지 경성으로 내려가는 길’이란 의미였어요.

◇'근대'와 ‘침략’이 교차하던 지점

서울역은 개발과 근대라는 이기(利器)와 침략과 수탈이라는 흉기(凶器)가 교차하는 지점이었습니다. 하루를 자시(밤 11~1시), 축시(새벽 1~3시) 같은 12개 단위로 나누던 전통적인 시간 관념으로는 기차를 자주 놓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서울 시민들은 시(時)와 분(分)까지 꼼꼼하게 따져야 했습니다. 같은 돈을 내고도 일본인보다 낮은 등급 손님 취급을 받는 부당한 차별을 경험하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3등칸에 탄 조선 승객은 존재하지도 않은 4등칸 손님 대우를 받는다’는 일본인 승객의 기록도 있습니다.

철도는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때 전국에서 철도를 타고 온 사람들이 서울로 운집해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이 사람들이 철도를 타고 귀향하면서 전국 각지에 만세운동이 확산됐습니다. 그해 9월 1일 65세의 강우규 의사가 신임 조선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졌던 장소도 서울역 광장이었습니다. 지금 그곳엔 2011년 세워진 강 의사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