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31일 오전 8시 42분쯤 60대 남성 원모씨가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과 마포역 간 터널 구간을 달리는 열차에 불을 질렀다. /서울남부지검

지난달 31일 서울 지하철 5호선 마포역 인근에서 발생한 방화 사건 당시 방화범 바로 옆에 서 있던 승객이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전했다.

출근길 방화범 원모(67)씨 바로 옆에 서 있던 A씨는 26일 연합뉴스TV에 “처음에는 누군가 실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뒤에서 ‘촤악’ 소리가 났을 때까지만 해도 물이나 커피가 쏟아진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고,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고 A씨는 말했다. A씨는 “바닥에 연노란색 액체가 넓게 퍼져 있었다.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바로 기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문득 ‘아, 이거 기름이구나’ 싶었다. 정말 단 2~3초 만에 상황이 뒤바뀌었다”고 했다.

그렇게 A씨는 다른 승객들과 함께 본능적으로 앞 칸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앞 칸으로 간신히 몸을 피한 A씨가 뒤를 돌아보자마자, 조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엔 불길이 열차 천장까지 치솟은 상태였다.

이후 열차는 어두운 터널 한가운데에 멈춰 섰고, A씨는 한 중년 남성의 도움으로 열차에서 내린 뒤 터널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휴대전화 불빛에 의지해 간신히 발걸음을 옮기는 중에도 뒤쪽에선 매캐한 연기가 계속 밀려왔다고 한다. 그러다 멀리서 마포역 불빛이 보이고, 달려오는 소방관들을 마주하고서야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A씨는 회상했다.

검찰이 25일 공개한 사건 당시 지하철 내부 방범카메라(CCTV) 영상에 원씨가 가방에 숨겨뒀던 휘발유를 바닥에 쏟아부은 뒤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열차 내부에 불이 번지는 모습이 담겼다. /서울남부지검

한 임산부 승객이 넘어져 자신을 잡았지만, 그 사실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고 한다. A씨는 “도망치다 넘어져 무릎이 까졌는데, 아픈 줄도 몰랐다”고 했다.

벌써 사건이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A씨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주변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A씨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지하철을 이용해야 하는데, 탈 때마다 불안감을 느낀다”며 “25일 공개된 방범카메라(CCTV) 영상도 보려고 했다가 너무 떨려서 아직 못 보고 있다”고 했다. 아울러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는 절대 가볍게 다뤄져선 안 된다”며 “앞으로도 시민들이 걱정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으려면, 이번 사건에 대해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했다.

앞서 서울남부지검 ‘지하철 5호선 방화 사건’ 전담수사팀(팀장 손상희 부장검사)은 25일 살인미수와 현존전차방화치상, 철도안전법 위반 혐의로 원씨를 구속기소했다. 원씨는 지난달 31일 오전 8시 42분쯤 서울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을 출발해 마포역 방향으로 달리던 열차 안에서 휘발유를 바닥에 쏟아붓고 불을 질러 자신을 포함한 승객 160명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승객 6명을 다치게 한 혐의를 받는다.

서울남부지검은 원씨 구속 기소 당일 범행 장면이 담긴 지하철 내부 CCTV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를 보면, 원씨가 페트병에 든 휘발유를 바닥에 쏟아붓자 놀란 승객들은 소리를 지르고 서로 부딪치며 앞 칸으로 뛰었다.

특히 한 임산부가 달리다 휘발유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장면이 포착돼 네티즌들의 공분을 샀다. 이 임산부는 신발 한 짝을 포기하고 기어서 겨우 도망쳤다. 이 순간 방화범은 무심한 듯 라이터로 휘발유에 불을 붙였고, 붉은 화염은 순식간에 객차 천장까지 치솟았다. 검찰은 “특히 임산부인 승객이 휘발유가 살포된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져 미처 대피하지 못했는데도 피고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라이터로 휘발유에 불을 붙이는 등 살인의 의도가 객관적으로 확인된다”고 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기관사는 승객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대피로 안내를 했고, 승객들은 침착하게 지시에 따라 지하 터널을 걸어나왔다. 이 과정에서 성숙한 시민 의식도 돋보였다고 검찰은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