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공대 한 학과의 일부 연구실은 지난 3월부터 서버를 절반만 켜두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을 연구하는 서울대 연구소들의 전력(電力) 사용량이 폭증해 ‘블랙아웃(대정전)’을 걱정해야 할 수준까지 왔기 때문이다. 특히 전력 수요가 높은 여름철이 겹치자 AI 서버 가동이 필수인 연구소들은 그야말로 ‘비상’이 걸렸다. 해당 학과의 한 교수는 “밤을 새워 연구하기에도 모자란데 연구 시간을 인위적으로 줄여야 한다니 미칠 노릇”이라고 했다.
성균관대는 최근 AI 연구 증가로 전력 수요가 폭증하면서 연구소들 간 자체적으로 ‘전력 사용 제한’을 하고 있다. 특정 연구소가 논문을 발표할 시기가 되면 다른 연구소에서 AI 가동 시간을 줄이는 식이다. 이지형 성균관대 인공지능대학원장은 “상대적으로 급하지 않아 보이는 연구소들은 눈치를 보면서 서버 사용량을 줄이거나 심지어 끄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연세대·고려대에도 ‘첨단 AI 연구’ 수요가 급증하고 있지만 연구 설비 증설을 쉽사리 하지 못하고 있다.
AI 첨단 기술을 연구하는 대학 캠퍼스 곳곳에서 ‘구전난(求電難)’이 벌어지고 있다. ‘전기 먹는 하마’인 AI 연구에 대학들이 잇달아 뛰어들다 보니 전력 부족으로 연구 장비를 가동하지 못하거나 주요 연구실들이 전력 소비 배분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본지가 9일 서울 주요 대학의 최근 5년간 전력 소비량을 분석했더니 서울대 관악·연건 캠퍼스의 전력 소비량은 2020년 18만3336MWh(메가와트시)에서 작년 23만5420MWh로 4년 새 28.4% 증가했다. 같은 기간 연세대도 16.5%, 고려대는 14% 가까이 늘었다. 이들 대학은 작년부터 수차례 한국전력에 추가 전력 공급을 요청하고 있지만, 한전이 난색을 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학들의 전력 사용 급증은 ‘전기 먹는 하마’인 AI 연구 증가 때문이다. 생성형 AI 서비스의 전력 소모량은 기존 인터넷 검색보다 10배 이상 많다. 구글에서 텍스트로 검색할 때 평균 0.3Wh의 전력이 쓰이는 반면 ‘챗GPT’는 한 번에 2.9Wh를 소모한다. 특히 이미지나 영상을 생성하는 AI 서비스는 스마트폰 한 대를 충전할 수 있는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텍스트 기반의 AI 서비스보다 40~60배 전력을 더 소모하게 된다.
이에 서울대는 경기 시흥캠퍼스에 신규 데이터 센터를 구축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용량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이터센터는 AI 기술의 핵심 시설로 꼽히는 곳이다. 기존의 관악캠퍼스 전기 사용량을 시흥으로 분산시키겠다는 취지다. 서울대가 신축 데이터센터에 마련하게 될 서버실 연면적은 1만㎡ 규모로 학내 전체 서버실 면적(5513㎡)의 약 2배에 달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대는 AI의 핵심 인프라인 고성능 GPU(그래픽저장장치) 서버실을 시흥으로 분산 이전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고려대는 지난 2023년 전력 낭비를 줄이기 위해 교내에 흩어져 있는 서버를 통합 관리하기 위한 단일 클라우드(cloud·가상) 서버를 구축해놨지만, 여전히 전력 부족을 겪고 있다. 이성환 고려대 인공지능학과 주임교수는 “2022년 정릉 캠퍼스에 AI 연구를 위한 별도 데이터센터를 구축한 뒤 엔비디아의 고성능 AI 칩인 ‘H100’ 등 GPU 100여 대를 설치했다”며 “그러나 쓸 수 있는 최대 전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해 GPU를 모두 가동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고려대는 최근 안암캠퍼스 내 캠퍼스 개·보수 공사 명목으로 한전으로부터 확보한 여유분의 전력을 활용해 소규모 AI 연구소를 별도로 짓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연세대도 전력 소모가 큰 AI·양자컴퓨터 설비와 데이터센터를 인천 송도 국제 캠퍼스에 신축할 계획이다. 성균관대는 자연과학 캠퍼스 내 전력이 비교적 여유 있는 건물에 AI 공동 연구실을 만들고 있다. 나머지 대학들 중 상당수도 지방 캠퍼스에 데이터 센터를 건립해 전기 사용량을 분산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AI 연구의 산실인 대학들이 제대로 된 연구를 하기 위해선 정부 차원의 지원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차호정 연세대 인공지능융합대학원장은 본지 통화에서 “정부가 대학에 전력을 저가로 공급하거나, 공공 AI 데이터센터를 별도로 설립해 연구 중심 대학들이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장길수 고려대 공과대학장은 “수도권 외곽에 고전력 인프라 단지를 조성하고, 대학 간 공동 활용이 가능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