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백건 사회부 법조팀장

‘사법 농단’ 수사가 한창이던 2018년 7월 검찰에 출석한 한 판사 증언이다. “2016년 12월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있을 때 권순일 대법관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내가 선고한 판결을 민변이 계속 비난하고 있으니, 사회적 약자 사건인 한센인 사건을 빨리 검토해 올리라’고 했다.”

민변이 비난했다는 판결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대법원이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권 발동으로 인한 피해 배상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주심이 권 전 대법관이었다. 이 통화가 있은 지 2개월 만인 2017년 2월 권 전 대법관은 과거 한센인의 인권침해에 대한 국가 배상을 최초로 인정하는 판결을 했다. 정권 교체가 확실시되던 때였다. 현직 대법관이 시류에 맞춘 ‘정무 판결’로 진보 세력의 비판을 모면하려 했다는 얘기도 나왔으나 믿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엔 생각이 좀 달라졌다.

권 전 대법관은 대법관에서 물러난 뒤에도 겸직 중인 선관위원장직을 계속하려 했다. 주변에 “선관위원장 임기는 6년”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달 일부 선관위원이 전체회의에서 “관례에 따라 대법관 임기 만료일에 선관위원장직에서도 사퇴하라”고 공개 비판하자, “물러나겠다”고 주변에 말했다. 그러다 이후 비판이 잦아들자 대법관에서만 물러나고 선관위원장직은 유지하고 있다. 오는 21일 선관위 사무총장·차장 인사를 자기 손으로 하는 게 헌법적 책무라는 이유를 댔다.

그가 도대체 왜 선관위 인사에 이토록 목을 매는지 저의는 알 수 없다. 스스로 “중립적 인사를 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행동은 달랐다. 작년 1월 문재인 대선캠프 특보 출신 조해주씨가 선관위 상임위원으로 왔을 때, 조씨는 상임위원이 선관위원장을 대신해 선관위 인사와 선거 관리 등에서 전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내부 규정을 고치려 했다. 이 안건은 선관위 전체회의까지 올라갔다가 부결됐다. 친문(親文) 인사가 ‘선관위를 접수하겠다'고 시도한 셈인데 이 안건을 회의에 올리는 걸 허락한 장본인이 당시 선관위원장이던 권 전 대법관이다. 선관위 중립성에 대한 소신도 없으면서 선관위 중립성을 위해 남겠다고 하니 미심쩍다. 법조계에선 “권 전 대법관이 선관위 코드 인사를 한 다음, 정권에 새로운 자리를 요구하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권 대법관이 21일 뽑을 선관위 사무총장을 과연 외부에서 ‘중립적 인사’로 봐줄까. 오히려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까지 관리해야 할 그 사무총장은 선관위 공정성 시비가 일 때마다 불필요한 논란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선관위원장직을 끝까지 놓지 않은 권 전 대법관의 고집 인사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권 전 대법관은 성범죄 피해자의 입장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는 ‘성인지 감수성’이란 용어를 처음 쓴 판사다. 그 용례에 빗대면 그는 ‘자리 감지성’은 높을지 몰라도 ‘자리 감수성’은 둔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