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백건 사회부 법조팀장

고영한 당시 법원행정처장(대법관)과 전국 법원장 35명이 대법원 회의실에 둘러앉은 건 2017년 3월 10일 오전 10시였다. ‘양승태 대법원’이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판사들을 뒷조사했다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보도가 나온 직후였다. 이날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선고일이기도 했다.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김명수 춘천지법원장 한 명에게 참석자 모두가 쩔쩔맸다. 박 전 대통령 탄핵과 문재인 정권 출범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진보 판사 400여 명을 회원으로 둔 국제인권법연구회 수장인 그는 기세등등했다. “임종헌 행정처 차장부터 당장 보직 해임하라”고 했다. .

회의 도중 ‘박근혜 탄핵 인용’이라 적힌 쪽지가 참석자들에게 돌자 분위기는 더 얼어붙었다. ‘김명수 독무대’였다. 거의 유일하게 한 법원장이 “의혹을 사실로 속단하느냐”고 반박했다. 이 법원장은 회의 후 동료 법원장들에게서 “김명수가 누군지 모르나” “왜 그랬느냐”는 말을 들었다. 6개월 뒤 김명수 법원장은 대법원장이 됐고, 이 법원장은 ‘적폐’로 찍혀 갖은 공격을 받았다.

지난 7월 3일 열린 전국검사장회의는 이렇지 않았다. 당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채널A 사건’ 수사 지휘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을 배제하는 지휘권을 발동한 것을 두고 참석한 검사장 19명 중 18명이 ‘추 장관의 수사 지휘는 부당하다’는 의견을 냈다. 이들은 자기 회의 발언이 대검에 진 치고 있는 친문(親文) 검사들에 의해 추미애 법무부에 실시간으로 보고되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올 초 윤석열 사단 ‘학살 인사’를 지켜본 이들이 느꼈을 두려움은 3년 전 법원장회의 참석 판사들의 두려움보다 작다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법률가여서’ ‘후배들 눈이 있어서’ 소신을 말했다고 했다.

최근 진보 성향 판사들이 대법관·헌법재판관 등 요직으로 갈 때마다 법조계에선 “국회⋅검찰에 이은 정권의 사법부 접수 시도”라는 평이 나온다. 동의하지 않는다. 전직 대법관은 “국회엔 야당, 검찰엔 ‘윤석열 사단’이라도 있다”고 했다. ‘정권 충견(忠犬)’이란 욕을 먹는 검찰보다 먼저 정권 쪽을 향해 눕는 영리한 판사들이 법원 고위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법원 상층부는 3년 전 국회⋅검찰보다 먼저 접수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일의 그 법원장 회의는 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대법관들이 최근 ‘지엽적 절차’를 문제 삼아 엄연한 불법 노조인 전교조의 법외노조 조치를 무효화하고, 검사가 항소 이유서를 자세히 쓰지 않았다고 민주당 소속 은수미 성남시장에게 면죄부를 준 것도 이 연장 선상에 있다. 부장판사가 현 정부 환경부 장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기각 사유에 ‘최순실 일파(一派)의 국정 농단이 문제’라고 버젓이 적는 것도 마찬가지다. 바람보다 먼저 눕는 판사들이 법원을 ‘정권의 보루’로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