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2022년부터 대규모 전세사기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면서 전국 곳곳에서 피해자가 발생한 가운데, 최근 전세사기 범죄에 대한 첫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부산 지역에서 180억원대 전세사기를 벌인 50대 임대인 최모씨에게 사기범죄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이 확정된 것. 이 사건에서는 지난 1월 1심 재판부가 검찰 구형량인 징역 13년보다 높은 15년을 선고해 눈길을 끌었는데, 1심을 담당한 부산지법 동부지원 형사1단독 박주영 부장판사(현 부산지법 동부지원장)는 이례적으로 판결문 ‘양형 이유’에 피해자들이 제출한 탄원서 수십 장의 내용을 하나하나 요약해 담았다. 선고 후에는 위로의 말도 전했다. 이에 일부 피해자들은 법정에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피해자들을 울린 박 지원장은 서면(書面) 너머의 사람을 보는 판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산재사건에서는 어느 일가족의 ‘삶이 있는 저녁’을 고민하고, ‘무력하고 성긴 법을 들고 정의의 쪼가리라도’ 찾아보려는 자신의 한계가 신물 난다고 고백하는 판사다. 때문에 그의 판결문에는 온기가 있다. 사회구조적 문제로 기인한 비극을 기록하고 알리기 위해, 당사자에게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때로는 친절하고 때로는 따뜻한 양형이유를 쓴다. “평범한 악이 세상을 망치듯, 작은 배려나 호의, 공감과 걱정 같은 자잘한 선의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지요.” 지난 12월 2일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에서 만난 박 지원장은 부산 전세사기 사건 판결문을 ‘독특하게’ 쓴 이유를 이렇게 전했다. 다음은 박 지원장과의 일문일답.

- 지난 11월 20일 부산 전세사기 사건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어떻게 지켜봤나. "항소심(2심)에서 피고인이 피해를 회복할 것인지 여부를 관심 있게 보았으나, 항소기각 되는 것을 보고 피해회복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대법원 판결은 예상보다 빨리 확정되어 놀랐다.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실적 피해회복이 요원하다는 점에서 이 사건을 비롯한 전세사기 사건을 보면 착잡하기만 하다. 그나마 첫 판결이 무겁게 확정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박 지원장은 “피해자 있는 범죄에서 피해자들의 처지를 보고 듣다 보면 안타깝지 않은 경우가 없지만, 그중에서도 사기는 특히 그 피해의 후유증이 독특하고 심각하다”고 강조했다. “사기는 재산뿐 아니라 피해자의 소중한 시간을 앗아가고 스스로를 탓하게 하며, 피해자 본인과 주위 삶을 서서히 파괴한다. 전세사기 피해 청년들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출발점에서 전 재산을 잃음과 동시에,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믿음을 잃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앞으로 세상과 사람을 대하면서 지독한 불신에 기준점을 두고 평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폐해는 말할 수 없이 크다.”

- 특히 1심 판결문이 큰 화제가 됐다. "판결문을 상세히 쓰고 별도로 당부 편지까지 써서 전한 이유는, 이 사건의 재판장으로서 이러한 불신의 악순환을 조금이라도 회복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망쳐놓은 세상을 되돌리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반드시 존재하고, 비록 당장의 성과가 미미하더라도 악으로 기운 저울의 무게중심을 잡으려는 의지와 노력이 쌓이고 쌓이면 세상은 절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평범한 악이 세상을 망치듯, 작은 배려나 호의, 공감과 걱정 같은 자잘한 선의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 평소 '비정하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다. 세상은 점점 더 비정해지고, 법은 세상이 비정해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 같은데. "선과 악이 공존하듯, 세상에는 비정과 다정이 함께한다. 그러나 법원에는 비정들이 모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비정을 다루지만 법은 비정과 다정의 범주 바깥에 있다. 법 자체에는 감정이 없으니까. 법은 그저 규율할 뿐이다. 감정은 법을 해석하고 판단하고 집행하는 영역의 문제다. 사람에게 재판을 맡기는 이유다. 법은 속성상 현실을 추수하며 뒤쫓을 뿐 앞서갈 수는 없다. 다만 추격이 너무 늦으면 세상이 망가진다. 그렇기에 빨리 입법하고, 혹여 입법이 늦으면 유연한 해석을 통해 비정한 현실이 너무 멀리 도망가지 않도록 잡아야 한다. 특히 기술과 돈이 서로 밀고 당기며 급발진하고, 그 질주에 무수한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많이 봤다. 너무 방치하면 걷잡을 수 없다. 기술과 돈의 폭주에 맞설 힘이 법에 있다. 그러나 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약자와 소수자들을 보호하려는 사람들의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 판사, 법관으로서 허무함을 느꼈을 때도 있을 것 같다. "사실 판사라는 직업은 어떤 사회의 문제를 미리 막는 직업이 아니다. 나한테 주어진 사건이 오면 그걸 단지 알맞게 처리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아동학대 사망 사건의 경우 양형이 중요한 게 아니다. 아이가 살아 돌아올 수 없지 않나. 아이의 생명을 살리지 못한 데 대한 절실한 한계를 많이 느낀다. 산재사건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고, 재판에서 나쁜 사람들이 득 보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면 판사들조차도 법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끼고 쉽게 냉소할 수 있다. 그러나 판사들은 그러면 안 된다. 법이나 인권, 여러 가지 상황에서 마지막에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판사다. 판사들이 냉소해 더 이상 손쓰지 않는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라고 본다."

- 최근에는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예전 같지 않다.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보는지.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다. 사법부의 크고 작은 실수와 오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고, 그 못지않게 소통과 설명의 부재도 원인이라 본다. 한마디로 권위적이었다는 말이다. 그나마 법정에서의 권위적 진행은 확실히 많이 줄었지만, 국민의 시각에서 보면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을 것 같다. 해결책은 유일하다. 국민의 입장,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다. 역지사지는 무척 어려운 일이고,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만 구본형 작가의 '좋은 낚시꾼은 물고기처럼 생각한다'는 말이 머릿속에 박히고 자꾸 변용된다. '좋은 사냥꾼은 노루처럼 생각한다. 좋은 판사는 당사자처럼 생각한다. 좋은 아빠는 아이처럼 생각한다. 좋은 투수는 타자처럼 생각한다.' 여기에는 타인의 입장에 서려고 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담겨 있다. 왜 타인의 입장에 서야 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욕망이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게 만드는 거다. 즉 국민의 신뢰회복이라는 물고기를 잡고 싶은 강한 욕망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 물고기가 너무 잡기 어려워 그저 잡는 시늉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를 포함한 모든 사법부 구성원들이 진지하게 돌아봐야 한다."

- 법관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근래 들어 법원 안팎에서 편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판사는 편향에 강하게 버티도록 훈련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습득한 강력한 편향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균형감각이나 공정성에 대한 감각을 지속적으로 벼르고 별러야 한다. 저는 얼음 같은 부동심을 가진 판사보다, 허공에 매달린 줄 위에서 비틀대며 좌우로 어지럽게 팔을 휘저으며 걷는 법관이 더 좋은 법관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흔들리며 가는 길 위에서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걱정, 사랑과 연민’ 같은 감정이다. 온갖 악과 부조리가 가득 찬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법관의 단호함과 엄정함도 필요하지만, 사람을 바라보는 판사의 시선에는 온기가 있어야 한다. 홀로코스트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의 냉혹한 현실 인식과 인간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세상을 얼마나 지옥으로 만들었는지를 우리는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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