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조선일보] [광복 70주년 새겨보는 독립운동가] ―강우규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 1920년 11월 죽음을 앞둔 의사가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

"콰광!"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남대문역(서울역)에서 천지를 흔드는 폭발음이 들렸어요.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齋藤實)를 위한 환영 행사가 끝날 무렵이었죠. 한 발의 폭탄이 총독의 마차 뒤로 날아와 터졌고, 허리띠에 파편을 맞은 사이토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어요. 근처에 있던 총독부 관리 등 37명이 중경상을 입었어요. 강우규 의사가 바로 이 의거의 주인공이에요.

강우규 의사는 1859년 6월 5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 그는 어려서부터 유달리 총명하고 대범했다고 해요. 1883년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주해 한약방을 운영하며 많은 재산을 모았어요. 이때 번 돈으로 읍내에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워 신학문을 전파했어요.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는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하는 '경술국치'를 맞았어요. 그는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독립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했어요. 이듬해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망명한 그는 1915년 북만주에 '신흥동'이라는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어요. 이곳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웠어요.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고, 만세시위 운동은 해외 동포들에게 순식간에 퍼져나갔어요. 일제는 3·1운동을 무마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대한 식민 정책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꿨어요. 무력을 사용해 무단통치를 하던 '하세가와' 대신 새 총독을 우리나라에 보내기로 했죠. '조선을 영원히 식민지로 만들려는 술책일 뿐이야!' 강우규 의사는 새로 부임하는 조선 총독을 처단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에겐 이런 날을 대비해 미리 사둔 폭탄이 있었어요. 하지만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국내로 폭탄을 갖고 들어가는 게 문제였죠. 그는 기저귀를 차듯 폭탄을 다리 사이에 차고 들어가기로 했어요. 이 방법으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항까지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어요. 서울에 도착한 그는 신임 총독인 사이토가 9월 2일 부임한다는 사실을 신문을 보고 알게 됐어요. 그는 사이토의 사진을 오려 품에 지니고 다니며 얼굴을 익혔어요.

마침내 거사의 날이 밝았어요. 그는 폭탄을 명주 수건에 싸서 허리에 단단히 맸어요. 그 위에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었어요. 손을 넣으면 쉽게 폭탄을 꺼낼 수 있도록요. 오후 5시, 사이토 일행이 남대문역에 도착했어요. 행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사이토의 마차를 향해 그는 있는 힘껏 폭탄을 던졌어요.

사이토 처단에 실패한 그는 의거 15일 만인 9월 17일 순사에게 붙잡혔어요. 그는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어요.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던 날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어요. 마지막 감상을 묻는 일본 검사의 물음에 대답 대신 시 한 수를 읊었어요.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


사진·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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