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100리(약 40㎞)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과객(지나가는 나그네)을 후하게 대접하라…."
경주 교동마을 최부자댁의 '육훈(六訓)' 중 일부다. 300여 년간 만석꾼의 부(富)를 유지해 온 경주 최씨 가문의 역사가 깃든 장소다. 12대 만석꾼, 9대 진사(進士)
를 배출한 최부자 집안은 '가진 자는 그만큼의 의무를 지닌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해 지금까지도 사회 지도층의 본보기로 추앙받는다.
낮게 지은 솟을대문
을 지나면 50여 칸에 달하는 방과 한옥 한 채만큼 커다란 곳간을 볼 수 있다. 1700년경 지어질 당시에는 방 99칸에 곳간도 여러 채 있었다. 최부자댁이 한 해 생산한 쌀은 약 3000석. 이 중 2000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사회에 기부했다고 한다. 덕분에 사랑채는 1년 내내 손님들로 붐볐다. 최부자 가문의 마지막 만석꾼인 문파 최준 선생은 독립운동가였다. 선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줄을 맡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도 거액(巨額)을 기부했다. 당시 최부자 저택은 의병과 독립운동가의 은신처로 요긴하게 쓰였다.
한편 고택이 자리한 경주 교촌마을은 신라시대 최고 교육기관 국학부터 조선시대 향교가 자리하던 '배움의 터'였다. 최씨 고택은 주변에 새로이 복원된 한옥 마을과 어우러져 고즈넉함을 뽐낸다.
● 주소: 경북 경주시 교동 69(국가민속문화재 제27호)
조선시대 과거 시험 중 하나에 합격한 이들에게 주는 자격. 진사가 되면 성균관 입학 자격이 주어진다. 이들은 일정 교육을 받은 후 별도 시험에 응시해 관직에 나가거나 지역 유지로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지붕이 우뚝 솟게 지은 대문으로, 사대부 집안의 권위를 상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