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 맛, 바베큐 맛, 오징어 맛, 초콜릿 맛, 참깨 맛…. 대형 마트에 가면 수십 가지의 과자들이 진열대를 가득 메우고 있다. 가까운 동네 슈퍼마켓에 가도 입맛에 따라 골라 먹기에는 좋은 과자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서양식 과자가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불과 30여 년, 이전까지는 우리 전통과자가 주류를 이뤘다.

유밀과와 다식, 정과, 과편, 엿강정 등 전통 과자는 과정류 또는 한과류라고 불러 서양식 과자와 구분한다. 곡물에 꿀이나 엿을 섞어 만드는 과정류는 삼국통일 이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우리 민족이 곡물을 이용한 간식을 개발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특히 신라와 고려 때는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에 과정류가 한층 더 발달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한과는 조선시대에 들어 궁중에서는 물론 양반,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즐겨 먹으며 대표적인 기호식품으로 자리잡았다. 조선시대 문헌에 기록된 한과류가 모두 255종에 이르는 것을 보면 당시 한과의 인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궁중 연회상에는 한과가 빠지지 않았는데 다식, 강정, 엿강정 등 24가지의 과정류를 차려 낸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세종 1년(1419년) 아침에 제사를 지낼 때 유밀과와 과일을 섞어서 구과상(九果床·아홉 가지 과일로 차린 상)을 올린다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사신을 대접할 때, 혼례 등 행사 때 과정류를 사용한 기록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매년 봄이면 양식이 바닥나 5~6월 보리가 날 때까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를 먹던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유밀과는 치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세조 2년(1456년)에는 임금이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유밀과 사용을 금지하고 이를 어길 때에는 엄하게 처벌하겠다"는 기록이 있고, 정조 20년(1796년)에는 대사간 김한동이 "부자들이 경사가 있을 때 유밀과를 한 길(2.4~3m) 넘게 쌓는 등 사치를 숭상한다"며 이를 금지할 것을 상소한 기록이 있다. 곡물이 주된 물물교환 수단이었던 조선시대에 과정류는 물가를 올리는 주범이었기 때문이다.


◆검색어
유밀과, 유과(油果), 다식, 정과(正果), 숙실과(熟實果), 엿강정, 엿

◆더 알아볼까요?

유밀과(油蜜果):
밀가루나 쌀가루를 꿀과 참기름으로 반죽하여 판에 박아내거나 여러 모양으로 썰어 식물성 기름에 지진 뒤 꿀에 담가두었다나 차려 내는 간식. 요즘에도 제사상에 오르는 약과 등이 이에 속한다.

다식(茶食): 쌀가루와 꿀을 섞어 뭉쳐서 나무통 속에 넣고 짓이겨 만든 동그란 떡. 밤, 대추, 곶감, 호도 등을 반죽 재료로 함께 사용하며 모양을 내는 다식판에 찍어 냈다. 흰색, 노란색, 검은색 등 재료에 따라 다양한 색을 낼 수 있다.


/ 조찬호 기자 chjo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