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아! 조심…."
'퍼억~'
"어이쿠!"
강 건너에서 날아온 돌에 머리를 맞은 아랫마을 조 서방이 깨진 이마를 붙들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형님, 괜찮소?"
날아드는 돌멩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한걸음에 달려온 옆집 돌쇠 아범이 조 서방을 부축해 강둑까지 모셔 나온다. 조 서방은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절대 물러서지 마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우박같이 쏟아지는 돌멩이 사이로 신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마치 전쟁터 같지만 조선 초기 정월 대보름이면 어느 마을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석전(石戰)의 모습이다. 편싸움, 척석희(擲石戱)로도 불리는 이 놀이는 지방에 따라 단오나 한가위 등 명절에도 즐겼다.
아니 명절에 웬 돌 던지기 싸움?
요즘 같으면 어른들에게 혼나거나 경찰서에 붙잡혀갈 일이지만 조선시대 전국적으로 성인 남자들 사이에 성행했던 놀이였다.
석전은 날짜를 정해 두 마을 주민 사이에서 열렸던 향전(鄕戰)의 한 종목이었다. 줄다리기, 차전(車戰) 놀이와도 같은 셈이다. 향전에서 패하면 그해 마을에 흉년이 들거나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어 승패를 무척 중요하게 여겼다고 전해온다.
따라서 크게 다치는 사람도 발생했다. 몸싸움으로 번지지 않도록 주로 하천을 사이에 두거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먹만 한 돌멩이를 던져 겨뤘는데, 먼저 후퇴하면 석전에서 졌다. 석전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잦은 외국의 침략을 대비해 전투력을 키우는 방법 중 하나였던 것으로 전해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석전에 관한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특히 조선의 3대 왕인 태종은 석전을 즐겨 구경하였던 임금이다. 태종 2년(1402년) 단오에 '임금이 청화정(淸和亭)에 올라 석전을 구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아들 세종이 왕이었던 1421년에는 '상왕(上王)이 병조참판 이명덕을 보내 석전할 사람 수백 명을 모집했다'는 대목도 있다. 태종이 석전을 매우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지방 권력자들이 세력을 넓히는 수단으로 향전을 이용해 본래의 뜻이 변질되면서 금지하기에 이른다. 영조 47년(1771년)과 정조 13년(1789년)에는 석전을 금지한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영조는 석전과 함께 오랜 전통놀이인 단오의 씨름도 금지했다. 실록 속에서 씨름을 하다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 씨름은 꽤나 거친 경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 더 알아볼까요? ::
△상왕(上王)이란?
임금이 살아있으면서 왕위를 다음 임금에게 물려주었을 때, 물러난 왕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에서는 태조, 정종, 태종, 단종 등이 있었다. 상왕을 더 높여 부를 때는 태상왕(太上王)이라고도 불렀는데 세종 때 아버지 태종을 성덕신공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이라고 부른 예가 있다.
△대원군(大院君)이란?
조선시대 임금은 왕위를 물려줄 아들, 손자가 없거나 형제가 없을 때 종친 중에서 왕이 될 인물을 골랐다. 이때 왕위를 물려받을 새 왕의 친아버지를 대원군이라고 부른다. 보통 대원군이라고 하면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뜻하지만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최초였으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도 있다.
<검색어> 석전(石戰), 척석희(擲石戱), 씨름, 각저(角 ), 차전(車戰), 향전(鄕戰), 향전율(鄕戰律)
/ 조찬호 기자 chjo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