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법무부가 22일 워싱턴 DC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말레이시아 1MDB 부패 스캔들에 가담한 골드만삭스에 대한 29억달러 규모의 벌금과 부당이익 환수금 부과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저작권자 ⓒ 1980-202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말레이시아 국고 횡령 스캔들에 연루된 세계 최대 투자은행 골드만삭스가 미국에서 29억달러(약 3조2900억원)의 벌금성 합의금을 물어내게 됐다.

미 연방검찰은 22일(현지 시각) 워싱턴 DC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골드만삭스가 23억달러의 벌금과 6억달러의 부당이익 환수금을 내는 조건으로 기소유예 합의를 했다”고 밝혔다. 기소유예는 죄는 인정되지만 피해자와의 합의 내용, 반성 정도 등을 감안해 기소하지 않는 것이다. 골드만삭스가 내기로 한 합의금은 미국의 해외부패방지법 위반 사건 중 가장 큰 액수다. 이 29억달러는 피해 당사자인 미국과 말레이시아, 영국, 홍콩, 싱가포르 정부, 미 증권거래위원회와 연방준비제도 등에 분산 지급된다.

골드만삭스는 또 이날 홍콩 금융 당국으로부터 별도로 3억5000만달러의 벌금을 맞는 등 지금까지 말레이시아 등 관련국에 납부하기로 한 금액만 50억달러(5조6700억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골드만삭스 152년 역사상 최악의 치욕을 안긴 이 사건은 ‘1MDB(1말레이시아개발유한회사)’ 스캔들이다. 1MDB는 나집 라작(68) 전 말레이시아 총리가 취임 직후인 2009년 설립한 국영투자기업이다. 에너지 개발 등을 통해 국부를 늘린다며 말레이시아 석유를 담보로 미국과 중동, 유럽, 아시아 정부·기업을 대상으로 총 65억달러(7조3700억원) 상당의 채권을 발행했다.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가 2019년 4월 3일 쿠알라룸푸르 고등법원에서 열린 비자금 의혹 관련 첫 재판을 마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그런데 이 다국적 투자금 중 70% 정도인 45억달러(5조1000억원) 이상이 나집 총리와 그 측근들의 비자금이나 뇌물성 로비 자금으로 쓰였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2018년 5월 나집 총리가 물러난 뒤 그의 자택과 해외 별장 등에서 보석 1만2000점, 명품 가방 500여개, 반 고흐와 모네 그림, 호화 요트 등 수억달러어치 금품을 찾아냈다. 그의 계좌에서도 10억달러(1조1300억원)가 확인됐다. 나집은 지난 7월 뇌물 수수, 돈세탁 등 혐의가 인정돼 12년형을 선고받았다.

‘1MDB’ 사기극은 나집의 집사로 통하는 금융인 조 로우(38)가 설계했다. 그는 주로 미 서부에서 호화 생활을 하면서 배우 리오나르도 디캐프리오와 모델 미란다 커, 킴 카다시안 등에게 피카소 그림과 보석, 페라리 스포츠카를 선물하기도 했다. 조 로우는 중국에 도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 국민들이 지난 2018년 초대형 스캔들 1MDB 사기극을 설계한 나집 라작 전 총리의 개인 집사 조 로우의 송환과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이 사건에 골드만삭스가 연루된 부분은 1MDB의 65억달러어치 채권 발행을 대행하고 수수료로 6억달러(6800억원)를 받은 것이다. 골드만삭스가 6억달러를 벌고 몇 배의 벌금을 물어내게 된 것은, 투자자들이 골드만삭스란 이름을 믿고 투자하게 만든 윤리 문제를 심각하게 봤다는 뜻이다.

미 검찰에 따르면 조 로우가 2009년 골드만삭스 동남아 사업부 대표 티머시 레이스너(51) 등에게 1MDB 프로젝트를 맡길 때부터, 골드만삭스 내부에선 “조 로우의 막대한 재산 출처가 의심스럽다” “비자금 조성과 유용 정황이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골드만삭스의 1MDB 담당자들은 2014년까지 호화 선상파티 등을 통해 조 로우와 로이드 블랭크파인 전 골드만삭스 회장을 비롯한 수뇌부의 만남을 주선했다. 레이스너 등 사건에 직접 연루된 골드만삭스 직원 3명은 기소됐다.

골드만삭스가 1MDB 스캔들에 대한 지휘 책임을 물어 이미 지급한 1억달러 규모의 보너스 등에 대해 구상권을 청구할 것으로 알려진 로이드 블랭크파인(Blankfein) 전 골드만삭스 회장.

이를 계기로 뉴욕타임스 등 미 언론들은 지난 금융 위기 때도 부실 파생상품의 맹점을 알고도 팔아넘겨 ‘월가 탐욕의 상징’처럼 된 골드만삭스의 비윤리적 경영과 폐쇄적 조직문화를 맹폭하는 분위기다. 골드만삭스에 대한 벌금이 당초 50억~7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으나, 골드만삭스 측이 자사 출신인 개리 콘 전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과 공화당 인맥을 이용해 벌금 수준을 29억달러로 낮췄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골드만삭스의 올 3분기 순익(36억달러·4조원)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다.

골드만삭스는 내부 쇄신 차원에서 블랭크파인 전 회장과 데이비드 솔로몬 회장 등 전현직 임원의 책임을 묻고, 그간 이들에게 지급된 수억달러어치의 급여와 보너스를 압수하거나 구상권을 행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