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79번째 생일이자 미 육군 창설 25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가 워싱턴 DC에서 열릴 예정인 가운데, 이를 규탄하는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미 전역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시위는 ‘노 킹스(No Kings)’라는 이름으로 기획됐으며 “미국에 왕은 없다”는 구호 아래 트럼프의 권위주의적 행보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50501 운동(50개 주, 50개 시위, 하나의 목소리)’이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 이번 시위는 미국 전역 약 2000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필라델피아,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애틀랜타, 휴스턴, 샌프란시스코 등 주요 대도시는 물론, 보수 지역으로 알려진 오하이오주 그린빌 등에서도 시위가 진행됐다.
특히 미국 독립의 상징인 필라델피아에서는 약 10만명이 운집한 것으로 경찰은 추산했고, 뉴욕에서는 비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트 파크와 매디슨 스퀘어 파크 일대가 시위 인파로 가득 찼다. 시위 참가자들은 “노 킹스(No Kings)”, “우리는 왕이 아니라 국민의 통치를 받는다”, “트럼프는 민주주의의 적” 등의 구호를 외치며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자 단속, 성 소수자 탄압 정책 등을 비판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시위에는 ‘노킹스’ 구호 아래 미국 건국 정신을 강조하는 발언이 이어졌다. 교사, 퇴역 군인, 노동조합원, 이민자 가족 등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이 참석해 “미국은 국민의 나라이며, 권력을 남용하는 대통령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외쳤다. 한 참가자는 “우리는 조용히 살고 싶지만,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을 때는 거리로 나서야 한다”고 했다.
◇‘민주 텃밭’ 캘리포니아 대형 시위
14일 샌프란시스코 돌로레스 파크는 오전 11시부터 깃발과 시위 팻말을 든 사람들로 가득 찼다. 평소 시민들이 일광욕을 하는 동산에는 하얀 ‘ICE(이민세관단속국)는 엿 먹어라’라는 문구가 크게 쓰여져 있었다. 현장에는 최근 로스앤젤레스(LA)에서 큰 시위가 벌어진 불법 이민 단속 문제를 지적하는 시위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성소수자를 대표하는 무지개 깃발, 여성 인권을 지지하는 깃발, 우크라이나 및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깃발도 곳곳에서 보였다.
행진이 시작되기 전 시위 조직 측에서는 “절대로 경찰과 대치하지 말고, 말도 섞지 말고, 폭력적으로 대응하지 말라”고 수차례 공지했다. LA에서 시위대와 경찰·주 방위군이 폭력적으로 대치하며 일부 비판 여론이 일었던 점을 의식한 듯했다.
시위대는 이후 행진을 시작하며 “힘은 우리에게 있다(We have the power)”, “도널드 트럼프는 사라져야 한다(Donald Trump is gotta go)”, “이것이 민주주의다(This is what democracy looks like)” 같은 구호를 외쳤다. 시위 곳곳에선 “내 이웃을 잡아가지 마세요”, “1933년(나치가 독일을 장악한 연도)이 다시 벌어져선 안 된다”와 같은 피켓이 곳곳에서 보였다.
시위가 시작되자 왕복 4차선 도로 수만명 규모의 인파로 꽉 채워져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텍사스에서 살다가 샌프란시스코로 지난해 이사 왔다는 찬스 한씨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나왔다”며 “트럼프가 하고 있는 일련의 정책에 반대해 나왔다”고 했다. 멕시코 이민 3세라는 데이지 로페즈씨는 “나는 브라운(피부색이 갈색)이기 때문에 안 나올 수가 없다”며 “모든 브라운에게 파워를”이라고 했다.
성소수자 등 소수자에게 관대한 ‘히피’의 도시 샌프란시스코인 만큼, 이날 시위 현장에서는 나체의 시위자들도 보였다. 일부 성소수자들은 행진과 함께 키스를 하며 “우리를 내버려두라”고 외치기도 했다.
시위대는 이날 돌로레스 공원에서 샌프란시스코 시청까지 3시간 가량 행진했다. 시청 앞 잔디밭에서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생일 축하한다 트럼프”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퍼포먼스가 펼쳐지기도 했다. 그 앞에서 시위 참가자들은 한 명씩 돌아가며 몽둥이를 들고 트럼프의 인형을 세게 내려쳤다. 이날 시위는 샌프란시스코 인근 주요 도시인 오클랜드, 새너제이 등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로스앤젤레스는 트럼프가 국경 단속을 이유로 해병대와 주방위군을 직접 투입한 지역으로, 최근까지 ICE(이민세관단속국) 단속에 대한 반발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이날도 수천 명의 시위대가 시청 앞에 모였으며, 일부 지역에는 야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캘리포니아, 텍사스, 미주리, 네브래스카 등에서는 주지사들이 주방위군을 투입하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과 시위대 간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조지아주 애틀랜타 시위에서는 경찰이 도로 진입을 시도하는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사용했다고 미 언론들은 전했다.
◇5만명 행진한 뉴욕, “왕은 없다”
뉴욕에서는 맨해튼과 퀸즈, 브루클린 등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규모는 맨해튼에 위치한 뉴욕 공립 도서관 앞에서 시작된 시위로 뉴욕포스트에 따르면 약 5만명이 모였다. 오후 1시 30분부터 시위 참가자들은 도서관 인근 브라이언트 공원, 그랜드 센트럴 등에 모였다. 비가 세차게 내리고 바람이 강하게 불었지만 시위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들은 5번 애비뉴를 따라 다운타운 방향 26번가까지 행진했다. 시위 참가자들의 연령대는 다양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족도 있었고 휠체어를 타고 나온 고령자도 있었다. 이들은 거리를 따라 걸으며 “왕은 없다” “ICE는 꺼져라” 등 구호를 외쳤다. 현재 미 정부와 연방 지원금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컬럼비아대 학생 시위대가 37번가 인근에서 합류하자 시위대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들은 학교 정문 앞에서 별도로 출발한 이들이었다. 약 3시간 30분가량 이어진 시위는 오후 5시쯤 긴 행렬이 모두 시위 마지막 지점인 매디슨 스퀘어 공원에 이르러 끝났다.
◇ 수도 워싱턴 DC선 시위 없지만 일부 “노 트럼프”
이날 트럼프 지시로 군사 퍼레이드가 열리는 워싱턴 DC에는 대규모 시위가 열리지는 않았다. 주최 측은 트럼프가 군중을 탄압하는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는 우려 아래, 의도적으로 필라델피아 등 상징적인 도시로 중심을 옮겼다고 밝혔다. 하지만 워싱턴에서도 군사 퍼레이드가 열린 내셔널몰 주변에서는 ‘King-Free Since 1776(1776년 이후 미국엔 왕이 없다)’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일부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고, 전날 밤에는 약 60명의 군인 출신 시위대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경찰 저지선을 넘다 체포되기도 했다. 이들은 “트럼프가 계엄을 발동하던 말던 상관없다”며 반트럼프 구호를 외쳤다.
미네소타에서는 이날 주 의회 의원이 괴한 총격에 사망하는 사건으로 인해 모든 ‘노킹스’ 시위가 긴급 취소됐다. 민주당 소속 멜리사 호트먼 주 하원의원과 남편이 괴한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고, 존 호프먼 주 상원의원과 그의 아내도 중상을 입었다. 경찰은 용의자가 경찰을 사칭했으며, 차량에서 ‘노킹스’ 관련 유인물과 표적 리스트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는 이를 “정치적 암살”이라 규정하고 시위 자제를 촉구했다.
한편 이날 오후 6시 30분(현지 시각)부터 워싱턴 DC에서는 약 6700명의 군인이 참가하는 미 육군 창설 250주년 기념 퍼레이드가 개최된다. 내셔널 몰 주변에는 M1 에이브럼스 전차, 아파치 헬기, 과거 전쟁 장비 등이 전시됐고, 공중 낙하 시범, 군악대 공연, 불꽃놀이 등도 예정돼 있다. 이번 퍼레이드의 예산은 약 2500~4500만달러(약 340~615억원)로 추산된다.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비가 오든 해가 뜨든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된다”고 밝혔다.
이날 점심이 지난 시간부터 내셔널 몰 일대에는 퍼레이드를 보려는 시민들로 긴 줄이 들어섰고, 티셔츠와 모자 등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굿즈를 파는 가판도 곳곳에 보였다. 워싱턴 DC의 한 로펌에서 패러리걸(법률보조원)로 일하는 수전씨는 “무리하게 행사를 진행하다보니 도로 등 도시 곳곳이 망가질 것이라 한다”며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못 말리는 대통령의 생일 잔치”라고 했다. 반면 메릴랜드주에서 온 애덤 니콜슨씨는 “수도에서 이 정도 되는 퍼레이드를 보기 쉽지 않아 가족들과 함께 왔다”며 “여러 잡음이 있지만 이전 정부(바이든)과 비교하면 트럼프가 지난 6개월 동안 괜찮게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