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최초의 여성 국가 지도자였던 비올레타 차모로(95) 전 니카라과 대통령이 코스타리카 산호세에서 14일 별세했다. 유족들은 이날 X에 소식을 알리고 “(유해는) 니카라과가 다시 평화로운 공화국이 되기 전까지 우선 코스타리카에 안치될 것”이라고 밝혔다. 짧게 친 은발이 트레이드마크였던 그는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전 국가 고문 등과 함께 1980~1990년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민주화 항쟁을 이끈 대표적 여성 지도자로 꼽힌다.
니카라과에서 유복한 목장 집안의 딸로 태어난 차모로는 언론인이자 정치인이었던 남편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 카르데날을 만나 가정주부로서 평범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남편이 니카라과를 50여 년째 통치해 온 소모사 가문을 비판하는 사설을 신문에 썼다가 1978년 괴한에게 피살되자 남편의 신문사를 인수하며 정치에 투신했다. 이듬해 소모사 정권은 좌파 게릴라 출신 다니엘 오르테가가 이끄는 산디니스타민족혁명전선(FSLN)에 의해 축출됐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오르테가와 FSLN은 강경 반미 노선과 경제난으로 민심을 잃었고 저항하는 국민을 공권력으로 탄압했다. 좌파 독재에 맞선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선 차모로는 11년째 집권해오던 오르테가를 1990년 대선에서 꺾었다. 이후 7년간 집권하면서 정치적 다양성, 오랜 내전으로 분열한 사회 통합에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워싱턴포스트는 “차모로는 지지자들에게 어머니로 불리며 평화와 이해를 설파했던 니카라과의 성인(聖人)과도 같은 존재였다”고 평했다.
남성 우월주의 풍토가 강했던 중남미에서 차모로가 존재감을 남기면서 파나마(1999년 미레야 모스코소)·칠레(2006년 미첼 바첼레트)·코스타리카(2010년 라우라 친치야) 등 중남미 여성 대통령 배출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도 나온다. 차모로 퇴임 이후 니카라과는 오르테가가 2006년 재집권에 성공해 20년째 집권 중이다. 차모로는 오르테가 정권의 탄압을 피해 2023년 코스타리카로 이주했다. 딸 크리스티아나 차모로(71)도 2021년 야권의 유력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가 오르테가 정권에 의해 출마 자격이 박탈된 뒤 2023년 코스타리카로 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