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북한 평양 순안 국제공항에서 안드레이 벨로우소프(왼쪽 백발) 러시아 국방장관을 노광철 북한 국방상(오른쪽 끝)이 맞이하고 있다./AP 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에 새 변수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러시아의 조급함이 가중되는 중이라는 신호가 나오고 있다. 러시아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취임하는 내년 1월 이후 평화 협상을 통한 조기 종전을 기대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세의 수위를 높여왔다. 그러나 북한군 파병 이후 서방이 장거리 타격 무기 사용 제한을 해제하며 우크라이나 지원을 연일 강화하자 전선의 불확실성이 다시 커지고 있다. 심지어 우크라이나의 자체 핵무장론까지 나오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와 서방에 대한 보복 공격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발언 수위도 급격히 끌어올리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는 29일 “안드레이 벨로우소프 러시아 국방장관이 오늘 북한을 공식 방문했다”고 발표했다.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이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예고 없이 이뤄진 방문이다. 지난 6월 이후 북한과 러시아 간 고위 인사의 방문은 10월 말 최선희 외무상의 모스크바 방문을 비롯,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3차례 이상이다. 러시아 매체들은 “지난달 말 최선희 북한 외무상이 모스크바를 공식 방문할 당시에 조만간 러시아 고위 인사가 북한을 방문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으나 누가, 언제 방문할지는 알려지지 않았었다”고 전했다.

벨로우소프 장관은 지난 6월 푸틴 대통령의 북한 방문 때도 동행했다. 당시 러시아와 북한은 구(舊)소련 시절의 군사동맹 관계를 회복하는 내용의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대한 조약’(러·북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이후 북한의 무기와 병력 지원이 이 조약에 기반한 것임을 암시해 왔다. 북한도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러시아에 병력을 보냈냐”는 질문에 “북·러 조약의 의무를 충실히 유지할 것”이라며 이를 간접적으로 시인한 상황이다.

그래픽=김하경

러시아 국방장관의 북한 방문은 군사 협력 문제를 추가 논의하기 위한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벨로우소프는 이날 노광철 북한 국방상을 만나 “오늘 회담을 통해 러·북 간 군사 분야의 전략적 파트너십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며 “동북아시아의 전쟁 위험을 줄이는 것이 목표”라고 주장했다. 노 국방상도 “북한과 러시아군의 전투적 우의와 협력이 최우선 순위”라며 “양국의 국방·안보 협력을 위한 가치 있고 건설적 제안이 오갈 것”이라고 화답했다. 벨로우소프는 방북 기간 수차례의 고위급 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북한의 추가 병력 파견 및 무기 지원 확대, 또 이에 대한 ‘대가’가 중요 의제가 될 전망이다.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이미 석유와 식량, 로켓 부품 등을 공급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앞서 지난 19일 유럽의회 화상 연설에서 “(현재 1만2000여 명 수준인) 북한군 파병 규모가 10만명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로이터는 25일 “북한이 함흥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공장의 확장 공사를 하고 있다”며 북한이 무기 지원 규모를 늘릴 준비 중임을 시사했다. 평화 협상 전 한 치라도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려는 격전이 전선 전역에서 펼쳐지면서 병력과 무기 소요도 폭증할 전망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영국·프랑스 등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은 이에 맞서 우크라이나 지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산 에이태킴스(ATACMS·미 육군 전술 미사일 시스템)와 영국산 스톰 섀도 미사일 등 사정거리 200㎞가 넘는 장거리 타격 무기의 러시아 본토 타격 제한이 해제된 데 이어, 프랑스가 “우크라이나 지원에 (지상군 파병 등) 어떠한 수단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럽연합(EU)은 28일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의 해외 동결 자산을 활용한 181억유로(약 27조원)의 대출 지원을 발표했고, 유럽의회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참전한 북한에 전쟁범죄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한국도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해달라”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에 한층 고조된 ‘위협 발언’으로 대응했다. 카자흐스탄을 국빈 방문 중인 푸틴 대통령은 28일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획득을 어떻게든 막겠지만 만약 그렇게 되면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러시아가 보유한) 모든 무기를 사용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는 사실상 우크라이나에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앞서 서방 정부 관료들의 발언을 인용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퇴임 전 우크라이나에 핵무기 제공을 제안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젤렌스키도 지난달 17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불가능하다면 핵무기 보유를 고려하겠다”고 했다.

우크라이나는 구소련 붕괴 직후인 1990년대 초반 1200여 개의 전략 핵탄두와 2000여 개의 전술 핵탄두, 170여 기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40여 대의 전략 폭격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이 핵무기들을 제대로 관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미국과 러시아, 유럽 국가들의 압력으로 핵 포기를 결정하고 보유 핵무기를 모두 러시아에 넘겼다. 당시 미국과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의 안보 보장을 약속하는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를 썼으나, 이는 2014년 2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과 2022년 2월 전면 침공으로 휴지 조각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