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 중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 전격 발탁된 가브리엘 아탈(34) 신임 총리는 9일 임명 직후 소셜미디어 엑스(옛 트위터)에 “프랑스의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힘 있고 겸손하게 직무에 임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프랑스 역사상 최연소 총리에 오른 그는 나이뿐 아니라 성 정체성 때문에 더욱 주목받고 있다.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공개(커밍아웃)한 최초의 프랑스 총리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동성애자가 국가 지도자가 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룩셈부르크·벨기에·아이슬란드·아일랜드 등의 현직 총리도 동성애자다. 하지만 이들은 다양성과 소수자 권리를 중시하는 좌파 정당 소속이다. 아탈은 중도좌파 사회당에 입당했다가 2016년 중도우파 집권여당 ‘전진하는 공화국’으로 옮겼다.
아탈의 총리 임명을 계기로 서구에서 성소수자 이슈는 진보·좌파 전유물이라는 공식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라트비아에서도 우파 국가 지도자가 나왔다. 지난해 7월 취임한 에드가르스 링케비치(51) 대통령이다. 중도 우파 단합당 소속인 그는 외무장관이던 2014년 소셜미디어에 커밍아웃했다. 국가 지도자는 아니지만 유럽 최대 경제대국 독일에서도 원내 3위의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의 공동 대표이자 여성 동성애자인 알리스 바이델(45) 공동 대표가 주목받고 있다.
이렇게 유럽에서 우파 동성애자 지도자들이 잇따라 등장하는 것은 동성애를 금기시해온 보수 정치의 오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배경엔 두 가지가 꼽힌다. 먼저 반(反)이민 정서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난민과 이민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구축된 강력한 반이민 정서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반감을 희석시켜 주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성소수자 정치 지도자들이 반이민 정책 색채가 짙은 정책을 주도하는 장면이 잇따라 연출되고 있다. 아탈 신임 총리는 교육부 장관 시절 공립 초·중·고교의 무슬림 전통 복장 금지 정책을 밀어붙였다. 바이델 대표는 “부르카(이슬람식 얼굴 가리개)를 착용한 소녀들과 칼잡이 남성들에게 정부 보조금이 들어가고 있다”며 이민자를 겨냥한 극단적 발언까지 했다.
또 하나의 배경은 보수 진영의 기독교 탈동조화 경향이다. 최근 주목받는 우파 동성애자 정치인 중에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울러 교회의 동성애에 대한 시각도 달라졌다. 바티칸 교황청은 최근 동성 커플에 대해 사제가 제한적 범위에서 축복할 수 있도록 했다.
유럽의 보수 정치 진영과 성소수자가 결합해 정치적 파워를 키우는 흐름도 뚜렷해지고 있다. 네덜란드·노르웨이·독일·스웨덴 등 유럽 10국의 중도 우파 성향 성소수자 단체 11곳은 2013년 ‘유럽 중도 우파 LGBT+(동성애·양성애·성전환 등 성소수자를 이르는 표현) 연맹’을 창설하고 활동 폭을 넓히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동성애자 인권단체를 극단주의자로 규정하고 활동 금지를 법제화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진보 정당·단체가 주도해온 성소수자 인권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이런 흐름이 이어질 경우 우파 진영의 유력 정치인들이 과거엔 거들떠보지 않았던 성소수자 표심을 적극 구애하는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앞서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16년 대선 후보 시절 “우리 성소수자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내 힘이 닿는 한 모든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집권 뒤 성소수자의 군 복무 금지 조치를 내려 성소수자 진영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공개 동성애자인 리처드 그레넬 전 국무부 대변인을 독일 대사와 국가정보국 국장대행에 잇따라 임명하며 중용했다. 올해 총선이나 대선이 예정된 핀란드·포르투갈·슬로바키아·벨기에·리투아니아·오스트리아 등 유럽 주요국에서는 보수·진보를 불문하고 각 정당들이 성소수자 권익 공약을 대거 내놓으며 표심 잡기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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