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일 자로 중국에서 개정 ‘반(反)간첩법’이 발효되면서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의 ‘내정간섭’ 발언으로 경색됐던 한·중 관계가 재차 얼어붙고 있다. 모호한 반간첩법 규정 탓에 자칫 업무나 여행으로 중국에 갔다가 중국 공안당국이나 반탐(反探)당국에 의해 졸지에 ‘간첩’으로 몰려 체포나 구금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다.
개정 반간첩법에 따르면, 중국 공안당국은 간첩혐의가 의심되는 사람의 휴대물품 등을 강제수색할 수 있고, 조사를 위해 8시간에서 최대 24시간까지 구금할 수 있다.
이에 1차적으로 여름휴가철을 앞두고 중국행 관광객이 급감하는 것은 물론, 중국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은 중국 사업은 물론 주재원 등 인력수급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의 주중 한국대사관을 비롯해 교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상하이·광저우·칭다오 총영사관 등 주요 공관들은 반간첩법 발효에 앞선 지난 6월 26일 일제히 ‘안전공지문’을 교민사회에 전파했다. 혹여 공안(公安)이나 국안(國安·국가안전부), 인민해방군 방첩당국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체포될 경우 신속한 영사조력을 요청토록 하는 행동요령까지 전달한 상태다.
주중 한국대사관 측은 “기존 5개장(章) 40개 조항에서 6개장 71개 조항으로 많은 부분이 개정되었다”며 “우리나라와는 제도·개념 등의 차이로 예상치 못한 피해가 생길 수 있으니 중국에 체류하고 있거나 방문 예정인 우리 국민께서는 아래 사항에 유의해 주시기 바란다”고 밝혔다.
주중 한국대사관 측이 거론한 대표적인 사례는 중국의 국가안보 및 이익과 관련된 지도, 사진, 통계자료(데이터) 등을 인터넷으로 검색하거나 스마트폰·노트북 등 전자기기에 저장하는 행위다. 대사관 측은 “군사시설이나 주요 국가기관, 방산업체 등 보안통제구역 인접 지역에서의 촬영 행위나 시위현장 방문과 시위대를 직접 촬영하는 행위, 중국인에 대한 포교나 야외 선교 등 중국 정부에서 금지하고 있는 종교활동도 반간첩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도 경고했다.
외교부 역시 중국의 개정 반간첩법 시행에 앞선 지난 6월 22일 국내 여행업계 관계자들을 외교부로 불러모아 중국의 반간첩법 시행과 관련한 주의를 촉구했다. 지난 7월 4일에는 최영삼 외교부 차관보(전 상하이총영사)가 베이징을 찾아 쑨웨이둥(孫衛東) 중국 외교부 부부장(차관)과 만나 중국 내 우리 기업 및 교민들의 예측 가능한 사업환경 조성을 위한 중국 측의 각별한 관심과 협조를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국무부 역시 개정 반간첩법 발효를 하루 앞둔 지난 6월 30일(현지시각) “부당한 구금우려가 있다”면서 중국을 ‘3등급, 여행재고’ 지역으로 지정했다.
개정 반간첩법에 외교부 초비상
사실 반간첩법 개정 발효 전에도 이미 상당수 외국인들이 중국 당국에 의해 ‘간첩혐의’로 구금돼 곳곳에서 외교마찰이 벌어졌다. 지난 5월에는 홍콩계 미국인인 존 렁싱완(중국명 梁成運)이 ‘간첩죄’로 쑤저우 중급인민법원에서 무기징역과 함께 벌금 50만위안(약 8900만원)을 선고받았다.
홍콩 출신 미국 국적자로 올해 78세인 존 렁싱완은 미국 텍사스주의 미·중우호촉진회장, 중국화평통일촉진회 주석을 맡을 정도로 유명한 친중파 재미화교였다. 화평통일촉진회는 중국공산당 통일전선부의 지도를 받는 조직이다. 한데 존 렁싱완은 2021년 4월 쑤저우에서 돌연 ‘간첩혐의’로 체포됐다. 간첩죄를 다루는 중국 형법 제110조와 111조에 따르면, 간첩죄는 죄의 경중에 따라 최소 3~5년 이상 유기징역형에서 최고 10년 이상 유기징역 또는 무기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
앞서 지난 3월에는 일본 아스텔라스제약의 한 50대 직원이 베이징에서 중국 당국에 체포됐다. 이 남성은 20년 이상 중국에 주재하면서 ‘중국일본상회(상공회의소)’ 부회장까지 지낸 베테랑 주재원으로 알려졌는데, 귀국비행기 탑승을 앞두고 간첩혐의로 체포됐다.
자국인 석방을 위해 지난 4월 하야시 요시마사(林 芳正) 일본 외무상이 직접 베이징을 찾아 친강(秦剛)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장관)과 만나 일본인 남성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중국 당국으로부터 “법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을 받는 데 그쳤다.
하야시 외무상은 친강 외교부장의 상급자인 왕이(王毅) 중국공산당 외사공작판공실 주임(정치국원), 리창(李强) 국무원 총리(정치국 상무위원)와도 만나 일본인 남성의 석방을 거듭 촉구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다. 오히려 하야시 외무상과 만난 중국 고위 당국자들은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맞는 중·일 관계를 구축하기 바란다”고 밝히며 해당 남성을 사실상 외교적 인질 삼아 일본의 대중정책 변화를 촉구했다. 사실상 중국의 인질로 전락한 셈이다.
이 같은 사례가 알려지면서 반간첩법은 업무상 중국을 자주 찾는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고 있다. 지난 6월 말 중국 출장길에 오른 한 기업인은 상하이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휴대폰과 노트북에 저장돼 있는 중국 관련 사진이나 자료 등을 미리 한국에 있는 별도의 컴퓨터와 저장장치에 백업한 뒤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7월 1일 반간첩법 발효를 앞두고 일종의 자체검열을 강화한 셈이다. 이 관계자는 “만에 하나 반간첩법에 연루될 경우 향후 10년간 중국 입국이 제한되는 등 치명적인 손해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스스로 몸조심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제3국 대상’ 한국에 치명적 조항
반간첩법 개정 발효 전에도 중국에서 사진촬영 등은 민감한 문제였다. 2017년 3월에는 산둥성과 하이난성 일대에서 온천개발을 목적으로 지리 및 지질측량을 하던 일본인 남성 6명이 중국 당국에 의해 간첩혐의로 체포됐다. 이때도 노트북 및 개인저장장치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사진과 지도가 문제가 됐다. 이 중 4명은 일본으로 추방됐는데, 남은 2명 중 50대 남성은 하이난성 제1중급인민법원에서 징역 15년에 벌금 10만위안(약 1800만원), 70대 남성은 산둥성 옌타이의 중급인민법원에서 징역 5년6월에 벌금 3만위안을 선고받았다.
중국 당국에 따르면, 이들 일본인은 온천개발을 명분으로 산둥성의 북해함대 항공모함 기지와 하이난성의 남해함대 핵잠수함 기지 일대를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2016년에는 저장성 원저우의 난지다오(南麂島)에서 사진을 촬영하던 일본 아이치현 출신의 한 50대 남성이 중국 당국에 간첩혐의로 체포됐다. 난지다오는 중국과 일본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서 약 300㎞ 떨어진 섬으로, 최근 중국은 레이더와 활주로 등 군사시설을 증강해 왔다. 결국 2018년 항저우시 중급인민법원은 이 남성을 일본 법무성 산하 정보기관인 ‘공안조사청 간첩’으로 결론내리고, 징역 12년형과 벌금 50만위안(약 8900만원)을 선고했다.
이들 일본 남성들이 실제 간첩행위를 했는지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중국 여행을 위해 지도를 휴대폰에 저장하고,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위험이 뒤따르게 된 셈이다.
특히 이번에 반간첩법을 개정하면서 새로 삽입된 ‘제3국 대상’ 간첩행위는 중국을 찾는 한국관광객이나 주재원, 재중교민들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힌다. 반간첩법 제4조6항은 ‘기타 간첩활동’을 규정한 조항으로, 중국 경내에서, 혹은 중국인과 중국 내 조직을 이용한 제3국 대상 간첩행위 역시 처벌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중국을 찾는 한국관광객 가운데는, 북·중 접경인 백두산(중국명 창바이산)이나 랴오닝성 단둥(丹東)의 압록강변 일대에서 북녘 땅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는 관광객이 적지 않다. 이제는 개정 반간첩법에 따라 중국 국적 조선족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북한 땅을 향해 사진을 찍어도 ‘제3국(북한) 겨냥 간첩’으로 오인되기 좋은 환경이 됐다.
실제로 반간첩법 최초 도입 이듬해인 2015년 5월에도 북·중 접경에서 북한 관련 정보를 수집하던 한 50대 일본 남성이 간첩죄로 중국 당국에 체포되기도 했다. 체포된 일본인은 1960년대 재일교포 북송사업 때 북한으로 귀국했다가, 2001년경 북한을 탈출해 중국과 동남아,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일본 여권으로 단둥 일대를 빈번히 드나들면서 북한 관련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이 남성은 2018년 단둥시 중급인민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다롄감옥에서 복역하다가 2020년에 형 만기로 석방된 바 있다.
자연히 중국 여행 시 중국 각지에 있는 북한식당에서 한복을 입은 여종업원들을 상대로 북한 사정을 캐묻거나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을 떠안게 됐다. 개정 반간첩법에 따르면, 이 같은 행위가 제3국(북한)을 겨냥한 ‘기타 간첩활동’으로 오인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한 재중 교민은 “옛날식으로 하면 중국에 있는 북한 식당을 찾는 한국 남성들은 전부 반간첩죄로 체포돼 징역을 살거나 추방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중국 경내에서 탈북인권운동을 하다가 중국 당국에 한 차례 구금된 적이 있는 한 인사는 “휴대폰 등 전자기기를 안 쓸 수는 없지 않느냐”며 “개정 반간첩법에서 ‘제3국’을 못박은 만큼 아무래도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일본, 지금까지 17명 간첩혐의 체포
다행히 외교부 재외국민보호과에 따르면, 지난 7월 1일 개정 반간첩법 시행을 전후로 우리 국민 가운데 반간첩법에 연루돼 중국에 구금된 사람은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일본 외무성에 따르면, 2014년 11월 반간첩법 최초 제정 후 지금까지 간첩혐의로 중국 당국에 체포돼 조사를 받은 일본인은 무려 17명에 달한다. 이들 17명 가운데 아스텔라스제약 주재원을 비롯한 5명은 지금도 중국에 구금된 상태다.
중국 당국에 의해 간첩혐의로 구금된 미국 국적자도 지난 2016년 미 연방수사국(FBI) 간첩으로 몰려 상하이 푸둥공항에서 체포돼 징역 10년형을 받은 중국계 미국인 사업가 카이 리를 비롯해 최소 3명 이상이다.
지난 2018년 미국의 요청에 따라 캐나다 정부가 중국 최대 통신기업 화웨이 런정페이 회장의 딸이자 최고재무책임자(CFO)인 멍완저우(孟晩舟) 부회장을 체포한 직후에는 캐나다 국적자인 마이클 스페이버와 마이클 코브릭이 ‘간첩혐의’로 중국 당국에 구금된 적이 있다.
이 중 마이클 스페이버는 한국에서 유학하고 대북 사업에 종사하면서 2013년 북한 김정은과 미국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먼의 만남을 주선한 인물이라 캐나다는 물론 남북한 모두에 상당한 충격을 준 바 있다. 결국 이들은 2021년 멍완저우 부회장이 풀려난 직후 곧장 석방됐는데, ‘간첩혐의’가 인질외교의 수단으로 쓰인 대표적 사례다.
베이징 한국인회의 한 고위 관계자는 “피부로 느낄 정도로 크게 동요하는 상황은 아니다”라면서도 “다만 종교 쪽에서 문제가 발생활 확률이 있어서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중국 내에는 한인들과 탈북자들을 상대로 목회활동을 하는 종교인들이 제법 되는데, 외국인이 중국 경내에서 종교조직을 설립하거나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중국법 위반이다.
실제 ‘종교활동’은 개정 반간첩법 시행과 함께 우리 외교부와 대사관에서 가장 염려하는 부분이다. 중국계 미국목사인 데이비드 린도 지난 2006년 체포된 이래 지금까지 구금돼 있다. 니콜라스 번스 주중 미국대사는 지난 3월 카이 리와 데이비드 린 등 중국에 구금된 미국인들을 직접 면회하고 석방을 촉구한 바 있다.
번스 주중 미국대사는 개정 반간첩법이 전인대(국회에 해당)를 통과한 직후인 지난 5월에도 “반간첩법은 미국 기업이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작업을 불법으로 만들 수 있다”며 “연구원, 교수, 언론인도 이 법으로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번스 대사의 경고처럼, 개정 반간첩법은 국내 기업들의 중국 내 사업과 인력수급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삼성을 비롯해 현대차·기아, SK, LG 등 국내 대기업들은 중국에서 대규모 생산시설을 운영 중이어서 중국 사업을 위한 현지 시장조사나 관계 공무원, 기업인들과의 만남은 주재원들로서는 필수적이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회사 차원에서 아직 지침이 내려간 것은 없다”며 “아직까지는 반간첩법에 따른 험악한 분위기가 감지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의 한 관계자는 “외교부에서 내려온 안전공지를 주재원들에게 전달한 정도”라며 “반간첩법 자체가 워낙 모호해서 구체적인 지침을 내릴 상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중국 현지 컨설팅업체와 논의해 대응방안을 결정할 예정”이라면서 “지금은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을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