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오른쪽)와 바티칸에서 만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AFP 연합뉴스

“세계가 새로운 냉전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지난 2014년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을 맞아 현지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일성(一聲)이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내전 개입을 계기로 러시아와 서방 간 ‘신 냉전’ 구도가 형성된 것을 우려하는 동시에 미국과 서유럽에게도 연대 책임을 묻고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였다. 8년이 지난 지금 고르바초프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서방 세계는 우크라이나를 전면적으로 지원하며 러시아와의 협력 관계를 끊었다. 러시아는 프랑스에 대한 가스 공급을 끊는 등 에너지를 무기 삼아 맞서고 있다.

30일(현지 시각) 사망한 고르바초프는 1931년 러시아 서부 카프카스 산맥 북부의 스타브로폴의 협동농장에서 태어났다. 그는 모스크바국립대를 졸업한 뒤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34세에 귀향해 고향의 공산주의청년동맹 서기로 본격 공직자의 길을 걸었다. 전후(戰後) 소련의 최대 현안이었던 식량자급을 위한 정책입안과 실행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공산당 중앙위원(1971년)·농업담당 당 서기(1978년) 등의 요직을 맡으며 공산당의 차세대 지도자군으로 떠올랐고, 1980년 ‘공산당의 꽃’이라 불리는 정치국원으로 선출됐다.

당 안팎에서 ‘차세대 서기장 후보’로 거론되던 고르바초프는 유리 안드로포프(1982~1984)와 콘스탄틴 체르넨코(1984~1985) 등 두 전임자가 잇따라 급서(急逝)하면서 54세에 소련 사상 최연소 지도자(공산당 서기장)가 됐다. 지방 당서기에서 중앙 무대로 진출하면서 데탕트(동서진영의 일시적인 해빙무드)부터 핵전쟁위기까지 지켜본 그에겐 ‘소련이 바뀌지 않을 경우 미국과의 경쟁에서 뒤지는 것은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도태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강했다.

고르바초프는 취임 이듬해인 1986년 공산당 전당대회 국정연설에서 “무능하고 부패한 당과 행정부, 평등주의적 소득균형 정책 등으로 국가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다”며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노선을 주창했다. 이 두 단어는 20세기 후반 현대사의 중요한 화두가 됐다. 그는 국가가 독점하던 무역을 기업에도 개방했고, 국가 고위직 선출에 선거제를 도입했다. 솔제니친·사하로프·파스테르나크 등 반체제인사들의 작품에 대한 금지조치도 풀었다.

1991년 8월 27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비에트 최고의회에서 연설하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EPA 연합뉴스

대외정책은 더욱 극적으로 전개됐다. 스무살이나 나이가 많았던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의 탄탄한 신뢰를 구축해나가며 1987년 역사적인 중거리핵전력조약을 체결하며 상호군축의 물꼬를 텄다. ‘반쪽 올림픽’ 사태 등 동·서 갈등의 한 진원지였던 1979년의 소련군 아프가니스탄 침공 사태도 9년만인 1988년 주둔군을 철수함으로서 결자해지(結者解之)했다. 이런 과감한 개혁·개방 정책은 폴란드·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 등 ‘위성국가’들의 독재붕괴·민주화의 동력이 됐고 이는 ‘독일 통일’이라는 거대 사건의 도화선이 됐다.

1987년 12월 8일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중거리핵전력조약에 서명하고 있다./로이터 뉴스1

고르바초프는 취임당시부터 동독의 호네커 공산독재정권에 대해 변화와 개혁을 촉구하며 거리를 뒀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고르바초프는 독일에 대한 영향력 상실을 우려해 성급한 통일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동독 공산 정권에 대한 군사 지원 등은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으며 서독의 흡수를 사실상 묵인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후 2개월 뒤인 1989년 12월 지중해의 섬나라 몰타에서 조지 H W 부시(아버지) 당시 미국 대통령과 “2차 대전 이후 냉전 체제를 끝내고 평화를 지향하는 새 질서를 수립한다”는 획기적인 내용이 포함된 ‘몰타 선언’을 발표했다. 미국과 서방세계가 주도하는 변화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공산진영의 종언(終焉)을 인전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듬해 그는 자신의 직책을 공산당 서기장에서 미국 등 서구국가들을 본딴 대통령으로 바꿨고, 독일 통일과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86년 4월 21일 동베를린을 방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왼쪽) 소련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 키스하고 있다./로이터 뉴스1

고르바초프에게 냉전 해체라는 큰 획을 그은 주역이라는 영광은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았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소련은 국제사회의 주도권을 미국에 넘겨주며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됐다. 여기에 개혁정책에 반감을 품어온 공산당 보수파와 더 높은 수준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세력이 동시다발적으로 발호하면서 정국은 불안해졌다.

결국 1991년 8월 공산당 보수파들이 크림반도에서 휴가중이던 고르바초프를 연금시키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쿠데타는 3일천하로 끝났지만, 고르바초프는 사실상 ‘식물 대통령’ 상태가 됐고, 결국 보리스 옐친에게 권좌를 넘겨주며 소련의 해체로 이어졌다. 최연소 소련 지도자로 오른지 6년만에 최후의 소련 지도자로 쓸쓸히 퇴장한 그는 1992년 환경보호운동과 전쟁난민어린이 구호 사업 등을 목적으로 하는 고르바초프 재단을 설립했다. 민족주의·권위주의 성향이 강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정책을 오랫동안 비판해왔으나,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신냉전’ 구도가 형성된 이후에는 푸틴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2004년 12월 21일 독일에서 가진 제라드 슈뢰더 독일 총리와의 양자회담후 가진 기자회견에 참석한 고르바초프(왼쪽) 전 소련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이야기하고 있다./로이터 뉴스1

고르바초프의 최근 공개 행보는 지난해 90세 생일을 맞아 진행한 타스통신 인터뷰에서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는 필요했고 우리는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추진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가 내부적으로 얻은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자유를 얻었고 전제주의 체제를 종식했다는 것”이라면서 “대외적으로 중요한 것은 냉전을 끝냈고 핵무기를 대폭 감축시킨 것”이라고 강조했다.

푸틴 시대 러시아 일각에서는 고르바초프가 민주화와 냉전 종식을 추구하면서 러시아를 ‘약골(weakling)’로 보이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고 미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전했다. 소련이 해체하면서 동유럽을 포기했다는 비판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 고르바초프는 2020년 이렇게 반박했다. “폴란드를 폴란드인에게, 헝가리를 헝가리인에게, 체코슬로바키아를 체코와 슬로바키아인에게 줬을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