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국제인권단체 ‘세이프가드 디펜더스’의 폭로로 불거진 한국 내 중국 비밀경찰서 총수로 의심받는 사람은 왕하이쥔(王海軍)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 회장이다. 서울 송파구 한강변에서 ‘동방명주’라는 선상 중식당을 운영하는 왕 회장은 현재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 회장과 자매조직인 한화(韓華)중국화평통일촉진연합총회 회장을 겸하고 있다.
중국재한교민협회는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넘어온 조선족 동포들을 위시한 중국 국적의 ‘신(新)화교’들이 2002년 결성한 교민단체로, 대만 국적의 ‘구(舊)화교’들이 주축이 된 한성(漢城)화교협회와는 별개 조직이다. 한성화교협회의 한 관계자는 “우리와 별 교류가 없는 조직”이라며 “재일교포 사회에 비교하면 민단(한국)과 조총련(북한)쯤의 관계에 해당한다”고 했다.
현재 재한 화교들은 중국과 대만 양측을 막론하고 중국재한교민협회 회장이 ‘비밀경찰’ 총수라는 의혹이 불거지자 일단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초미의 관심을 갖고 사태 추이를 지켜보는 중이다. 주한 중국대사관 역시 ‘비밀경찰서’ 개설 의혹이 불거진 직후인 지난 12월 23일 공식입장문을 내고 “관련 보도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허위”라며 “이른바 해외 비밀경찰국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국내 화교 관계자들도 요식업자인 왕하이쥔 회장이 비밀경찰 총수라기보다는 주한 중국대사관이 한국 내 대만 국적의 구화교들을 상대로 펼치는 ‘통일전선공작’을 수행하는 총책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통일전선공작부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등에서 주로 수행하는 ‘통전’ 업무는 공산당 외 제정파를 결속해 우군(友軍)으로 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왕하이쥔 회장이 총회장으로 있는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와 한화중국화평통일촉진연합총회 등 이른바 ‘양총회(兩總會)’라고 불리는 조직은 과거 리덩후이와 천수이볜 전 대만 총통의 대만 독립 시도에 맞서 이른바 ‘반독촉통(反獨促統)’을 기치로 재한 화교들을 단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관반민(半官半民) 조직이다.
리빈(李瀕) 전 주한 중국대사 재임 중 만들어진 이 조직의 초대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공식 한방주치의’인 고(故) 한성호(韓晟昊) 회장(신동화한의원 원장)이다. 대만 국민당 정보기관인 ‘중통(中統)’ 출신으로 주한 대만(중화민국)대사관 교무(僑務)비서를 지낸 한성호 전 회장은 이후 전향해 1992년 한·중 수교 때 밀사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친중 민간단체, 통일전선 공작
재한 화교들의 대부(代父)로 불리는한성호 전 회장의 뒤를 이어 2016년부터 양 단체를 이끌고 있는 왕 회장은 ‘비밀경찰 총수’라고 하기에는 신분을 드러내고 하는 공개활동이 너무나 빈번한 편이다. 왕 회장은 지난 11월 30일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사망한 직후 서울 명동의 주한 중국대사관에 분향소가 마련됐을 때 교민단체 대표 자격으로 참배와 헌화를 하기도 했다. 당시 방명록에 장쩌민 이름 석 자에 마오쩌둥이 지은 유명 시 ‘심원춘-설(雪)’에 나오는 글귀를 조합한 ‘강산다미교(江山多媚嬌)’로 시작하는 20글자를 남기기도 했다.
다만 중국 당국의 전폭적 지원을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2017년 8월에는 중국 관영 중국중앙방송(CCTV)이 ‘화인세계(華人世界)’라는 프로그램에서 그의 인생 역정을 집중 조명할 정도였다. 해당 프로그램에 따르면 1978년생으로 중국 산둥성에 원적을 둔 왕 회장이 한국에 처음 건너온 것은 2003년이다. 랴오닝성 푸순(撫順)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왕 회장은 조선족도 한족(漢族)도 아닌 만주족으로 알려졌는데, 조선족 출신의 배우자를 따라서 사업비자를 발급받아 한국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 진출 직후 왕 회장은 조선족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에서 한국식이 아닌 대륙식 중식당을 경영하면서 요식업에 진출했다. 이후 경기도 부천으로까지 사업을 넓힌 그가 본격적으로 교민단체 활동에 투신한 것은 2005년경으로 알려진다. 이후 재한중국교민협회와 한화중국화평통일촉진연합 등 교민단체에 가입했고 각종 직책을 도맡았다. 지금까지 거쳐간 왕 회장의 직책은 양총회 회장직과 화조중심(華助中心) 주임을 비롯해 재한 구로교민협회 회장, 재한 연변조선족동향회 회장, 중국교련(僑聯)청년위원, 베이징 해외연의회 청년위원, 장쑤성 교계청년총회 상무이사, 산둥성 해외연의회 상무이사, 랴오닝성 해외연의회 상무이사 등 무려 10개가 넘는다.
중국 국적을 가진 왕 회장은 중국에서 해외 화교업무를 총괄하는 국무원 교무판공실에서 주최하는 각종 연수와 행사에도 활발히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급기야 지난 2016년 11월 재한중국교민협회총회의 설립자이자 초대 회장인 한성호 전 회장의 뒤를 이어서 재한중국교민협회 총회장(2대)과 한화중국화평통일촉진연합총회장(5대)에 선출됐다. 회장직에 취임한 직후인 2017년에는 중국 춘절(春節·음력설) 연휴를 맞이해 인천의 차이나타운에서 재한 화교들이 참여하는 춘절축제를 기획하기도 했다. 왕 회장은 CCTV에서 “차이나타운에서 열린 행사 중 역대 최대 규모”라고 스스로 밝힌 바도 있다.
만주족 출신, 신화사 직함도
요식업자 출신인 왕하이쥔 회장은 중식당 외에 여행사와 건설사도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중국 관영 통신사인 신화사(新華社)의 공식 직책도 갖고 있다. HG(한강)미디어그룹 회장이라는 직함으로 2015년 신화통신의 인터넷 사이트인 신화망 한국총경리(CEO)를 맡으면서다. 신화사는 과거 홍콩·마카오 등지서 비공식 중국대사관 역할을 수행하면서 ‘실질 대사관’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다. 차오관화 전 외교부장이 초대 사장을 맡은 홍콩 주재 신화사는 1997년 홍콩 반환 직후, 홍콩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중앙인민정부 주홍콩 연락판공실’로 개칭해 실제 정체를 드러낸 바 있다.
2022년 기준 108만명의 등록외국인 가운데 40만명이 넘는 중국 국적 교민(조선족 동포 포함)을 대표하는 재한중국교민협회장을 맡고 있는 까닭에 왕 회장은 교민단체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행사하는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와 대등한 위치에서 활동하고 있다. 왕 회장은 지난 12월 5일 장쩌민 전 총서기 분향소를 찾았을 때도 교민단체 대표 자격으로 싱하이밍 대사 바로 옆에 서서 사진을 남겼다. “왕 회장이 싱하이밍 대사에 이어 중국대사관 넘버2”란 설이 돌기도 했는데 이는 ‘교민단체 회장’이란 특수성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거듭된 의혹에 왕하이쥔 회장은 지난 12월 29일 ‘동방명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비밀경찰서 보도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 정상적인 영업장소였으나 해당 사건 이후 도마 위에 오르게 됐다”며 “대한민국에 20년 가까이 거주하고 있는데 도대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한편 주한 중국대사관 측은 지난 12월 26일 “내정불간섭은 유엔 헌장의 기본원칙이고 중국 외교의 일관된 입장”이라며 “중국 측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의 내정을 존중해왔고, 과거는 물론 이후로도 한국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