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현미(본명 김명선)가 4일 오전 8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경찰과 가요계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37분쯤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에 현미가 쓰러져 있는 것을 팬클럽 회장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현미는 작곡가 이봉조가 사망한 후 30여 년을 홀로 지내왔다. 두 사람의 자녀들은 모두 미국에서 거주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현미는 1957년 미8군 무대를 통해 연예계에 데뷔했다. 처음에는 칼춤 무용수로 무대에 올랐지만, 일정을 펑크 낸 어느 여가수의 대타로 마이크를 잡으면서 가수가 됐다. 당시 미8군 부대 밴드마스터이자 천재 작곡가로 불린 고(故) 이봉조와 이때 인연을 맺게 됐다.
현미는 지난해 10월 방송된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에서 이봉조를 두고 “그분 덕분에 내가 스타가 됐다. 나의 은인이자 스승이요, 애인이요, 남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현미는 이봉조를 두고 “눈이 새카맣고 잘생겼었다”며 “추운 겨울에 트럭을 타면 내게 겉옷과 양말을 양보하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3년을 매일같이 만났고, 두 사람은 결혼하기로 했다. 현미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현미는 “나한테 총각이라고 해서 연애를 시작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딸이 둘 있는 유부남이었다”며 “26살인데 유부남일 줄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현미 뱃속에도 아이가 자라고 있을 때였다. 이봉조는 현미를 선택했고, 두 사람은 아들들을 낳으며 인연을 이어갔다.
지금도 현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대표곡 ‘밤안개’는 1962년 이봉조가 작곡한 노래다. 이후 이봉조와 콤비를 이뤄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 없이’ ‘몽땅 내 사랑’ ‘무작정 좋았어요’ 등 연이어 히트곡을 발표했다.
그러다 1974년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별거 생활에 들어갔다. 이봉조가 다른 여가수와 일본여행을 가는 등 염문설이 난 것이 이유였다. 현미는 “이미 자식이 둘 있었고, 나에게서 또 둘을 낳았다. 그럼 나는 그 사람을 돌려보내는 게 기본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별통보를 받은 날 밤, 이봉조는 술을 마시고 찾아와 야구방망이로 살림을 부수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미는 “잠옷 바람에 밍크코트 하나 입고, 애들 데리고 도망 나온 그날 영원히 헤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이봉조는 이후에도 오래도록 현미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1987년쯤 이봉조가 다시 찾아왔다고 현미는 생전 인터뷰에서 말했다. 현미는 “그 잘생긴 사람이 말라서, 위아래 틀니를 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했다. 이봉조는 “내가 이렇게 불쌍하게 살고 있는데 나를 이렇게 놔둘 거냐”고 물었고, 고민한 현미는 “내가 영감을 모실 테니까 건강하게 다시 살자”고 화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합가 약속 후 얼마 되지 않아 이봉조는 1988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현미는 “우리 운명이 거기까지밖에 안 됐나 보다”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현미는 여전히 이봉조에게 처음으로 받은 연애편지를 액자에 담아 보관하고 있었다. 그의 집 현관에는 이봉조의 서예 작품이 걸려 있었다. 현미는 “이봉조 선생님이 이 집안을 지키고 있다. 나를 지켜주고 있다”며 여전히 그를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한편 경찰은 고인의 지병 여부와 신고자인 팬클럽 회장, 유족 등을 조사해 정확한 사인을 규명할 계획이다. 빈소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