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지난 13일 열린 ‘미국-사우디 투자 포럼’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설 도중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를 칭찬하다 갑자기 팀 쿡 애플 CEO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젠슨 황을 비롯해 중동 순방에 동참한 이들을 가리키며 “팀 쿡은 없지만 당신들은 이곳에 있다”고 치켜세웠다. 그로부터 약 열흘 후인 지난 23일,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외에서 제조된 스마트폰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아이폰 주요 생산 기지가 중국과 인도에 있는 애플이 일격을 당한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업(시가총액 기준)’ 자리를 놓친 적이 드문 애플이 안팎의 위기에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對中) 관세 전쟁과 유럽의 빅테크 규제, 인공지능(AI) 부진이 한꺼번에 겹쳤다. 애플의 주가는 올 들어 20%가량 떨어졌고, 시가총액은 3조달러 밑으로 떨어져 마이크로소프트(MS)와 엔비디아에 밀린 세계 3위로 내려앉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애플이 내외에서 직면한 여러 위협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와 관계 틀어진 팀 쿡
26일 뉴욕타임스(NYT)는 “팀 쿡 애플 CEO는 한때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사랑했던 CEO 중 한 명이었는데 이제는 백악관의 집중 공격을 받는 상대가 됐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위협은 쿡 CEO에게 ‘운명의 반전’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출범 당시부터 대통령과 개인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구축해온 쿡 CEO는 트럼프 2기 출범을 앞두고는 규제 완화와 관세 면제 등 애플의 막대한 혜택을 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이와는 반대로 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애플이 인도에 아이폰 생산 공장을 확장하는 것을 문제 삼으며 미국으로 수입하는 스마트폰에 25% 관세를 부과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NYT는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중동 순방에 동참하는 것을 거부한 쿡 CEO에게 짜증이 났고, 쿡 CEO를 여러 차례 비난했다”며 두 사람의 불화가 관세를 촉발했다고 전했다. 이는 트럼프와 우호적 관계로 관세 면제를 받았던 1기 행정부 때와 대조된다.
불편한 관계는 애플이 직면한 각종 규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전망이다. 애플은 지난 4월 유럽연합(EU)에서 앱스토어 독점 운영으로 디지털시장법(DMA)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벌금 5억달러를 부과받았다. 미국 텍사스주에서는 애플 앱스토어 사용자에 대한 연령 확인을 의무화한 법안이 통과를 앞두고 있다.
애플은 중국에서 아이폰 판매가 급감하면서 매출 성장세가 전반적으로 둔화되고 있다. 여기에 아이폰 고율 관세, 앱스토어 수수료 수입 하락까지 더해지며 애플의 실적에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AI에서 뒤처지는 애플
외부 환경 변화와 함께 애플 자체의 경쟁력 문제도 대두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애플은 다음 달 9일 연례 개발자회의 ‘WWDC’에서 AI 관련 발표를 중심에 두지 않을 예정이다. 개발 중인 AI 기능들이 신기술은 완벽하게 마련됐을 때 공개한다는 애플의 철칙에 부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서 애플은 AI로 한층 업그레이드한 음성 비서 ‘시리’를 지난달 내놓을 예정이었지만, 내부 품질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 출시 일정이 무기한 연기된 상태다. 최근 오픈AI가 애플 출신 유명 디자이너 조니 아이브와 손잡고 AI 전용 기기를 개발한다는 소식도 애플에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애플은 오랫동안 경쟁사 대비 AI 전문 인력이 훨씬 적었고, 확보한 그래픽처리장치(GPU) 수도 적다”며 “1년에 한 번만 기술을 업데이트하는 애플의 전통도 빠르게 변화하는 AI 사업에는 맞지 않는다”고 했다.
애플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쿡 CEO가 최근까지 수차례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로 갈등을 풀려는 노력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미국 내 대규모 투자 및 일자리 창출을 화해 카드로 내놓을 수도 있을 것으로 점쳐진다. 트럼프가 타고난 협상가인 만큼, 애플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들어준다면 관세를 곧바로 내려줄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애플은 올해 WWDC에서 구글 AI ‘제미나이’와 협업한다는 내용을 공개할 계획이다. WSJ는 “애플은 최초의 음악 플레이어, 스마트폰, 태블릿을 만들진 않았지만, 때를 기다렸다가 최고의 제품으로 각 시장을 정복했다”며 “이런 전략이 AI에서도 통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