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전 9시 성남시 분당구 지하철 신분당선 판교역 1번 출구 앞은 끝없이 밀려나오는 출근 인파로 북적거렸다. 근처 환승 버스정류장은 만원 버스에 탑승하지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는 회사원들로 가득했다. 판교의 한 게임사에서 일하는 이모(38)씨는 “다음 버스를 기다리다간 지각할 것 같아서 추운 날씨에도 두 정거장 거리를 걸어서 출근했다”고 말했다. 판교 주요 기업 사옥으로 향하는 판교역 앞 횡단보도는 녹색불을 기다리는 인파가 길게 늘어섰다.
‘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에 다시 인파가 넘치고 있다. 2년 넘게 재택근무를 유지하던 카카오·넥슨·엔씨소프트·한글과컴퓨터 같은 이곳 대표 기업들이 속속 대면 근무 체제로 복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택근무가 확산하던 2021년 1월 2만명대로 급감했던 판교역 일 사용자도 지난 3일엔 4만3000명으로 회복됐다. 코로나가 본격 확산하기 전인 2020년 1월(4만2300명)과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온 것이다. IT 업계에선 “한국 ‘재택 1번지’로 변했던 판교가 대면 근무제로 돌아오면서 코로나가 낳았던 국내 재택근무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나온다.
◇재택근무 시대 사실상 종언
지난 5일 오후 12시 엔씨소프트 판교 본사 지하 구내식당. 2500㎡(756평) 면적, 좌석 754개 식당엔 빈자리가 없었다. 배식을 받으려면 15~20분씩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같은 날 오후 6시 국내 최대 게임사 넥슨 사옥 앞은 퇴근 셔틀을 기다리는 직원들로 북적거렸다.
엔씨소프트와 넥슨은 지난해 6월 ‘100% 회사 출근’을 재도입하며 판교 기업들 가운데 가장 일찍 재택근무를 끝냈다. 두 회사가 근무 체제를 코로나 이전으로 되돌리자, 스마일게이트·네오위즈와 같은 게임사부터 한글과컴퓨터·NHN과 같은 IT기업들이 재택근무 축소·종료 대열에 합류했다. 지난달 28일에는 직원 수 3800명 규모의 카카오까지 “오는 3월부터 출근을 기본으로 한 근무 체제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9일에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오는 2월부터 전면 사무실 출근을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현재 재택과 출근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네이버도 이런 분위기 아래 올 하반기 근무 체제에 변화를 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판교 IT 업계 관계자는 “기업마다 부서장 재량으로 재택근무를 일부 허용하지만 대부분 판교 기업은 직원의 70~80%가 출근하고 있다”고 했다.
판교의 변화는 여전히 재택근무가 주류인 미국 실리콘밸리와는 다른 선택이다. 판교 지역 한 IT 기업의 고위 임원은 “미국과 달리 고용 유연성이 없는 한국에서 재택근무는 기업 경쟁력을 갉아먹는 선택”이라고 했다. 구글·애플·메타 같은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직원이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뚜렷하고, 성과가 저조할 경우 해고가 가능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재택 중 직원의 업무 효율이 낮아지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국내 IT 업계에선 “재택을 하면서 근무 중에 ‘투잡’을 뛰는 개발자가 많지만 이들을 일일이 관리하기도 불가능하다”는 말도 나온다.
◇판교 상권은 ‘활짝’... 직원들은 불만
재택 시대 종언을 누구보다 반기는 것은 다시 활기를 되찾은 판교 지역 상인들이다. 본지가 한국신용데이터에 의뢰해 판교의 핵심 상권인 삼평동 일대 요식 업체 200여 곳의 매출(신용카드 기준, 배달 제외)을 분석한 결과 지난해 12월 업체들의 마지막 주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59%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지역 한 커피 전문점 점장은 “점심 피크타임엔 방문 고객이 재택근무 시절보다 2~3배 늘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 2년여 유지됐던 재택근무가 최근 갑작스럽게 종료되자 기업마다 불만을 토로하는 직원이 적지 않다. 특히 어린 자녀를 둔 직원들의 경우 육아와 근무를 병행할 수 있었던 생활 방식을 바꾸려니 애로사항이 많다는 것이다. 재택 종료를 예고한 카카오에선 지난 2주 동안 노조 가입자 수가 급증하기도 했다. 기업들은 복지 강화로 불만 진화에 나서고 있다. 네오위즈는 올해부터 3끼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엔씨소프트는 채식을 하는 직원들을 위해 비건 메뉴를 새로 추가했다. 넥슨은 구내 식당 증설을 검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