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4일 전세기 편으로 캐나다와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이 부회장은 약 열흘간의 출장에서 170억달러(약 20조원) 규모에 이르는 미국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공장 투자 계획을 최종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공장 부지로는 텍사스주 테일러가 유력한 상황이다. 이 부회장은 출국 전 김포공항에서 “파운드리 투자 결정을 하느냐”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여러 파트너를 만날 예정”이라고만 답했다. 하지만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올 초부터 다각도로 여러 후보 지역을 검토해왔고, 이 부회장의 결정만 남은 상태”라고 말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대만 TSMC와 미국 인텔이 애리조나주에 각각 120억달러와 200억달러를 투자해 파운드리 생산 라인을 구축하고 있다. 여기에 삼성전자까지 동참하면 지난 4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선언한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구상은 한·미·대만 반도체 동맹 형태로 실현된다. 일본도 최근 TSMC 파운드리 라인과 반도체 연구소를 유치하면서 동맹에 가세했다.
미국은 520억달러의 인센티브 지급을 약속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생산 거점을 유치해 중국을 글로벌 테크 패권 경쟁에서 고립시키겠다는 전략이다. 중국 내 공장 건립은 물론, 기술 확보까지 막아 중국 기술 굴기의 싹을 자르겠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자국 기업이 중국 내 새 공장을 짓는 것은 물론이고 기존 공장을 증설하는 것마저도 좌시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13일(현지 시각) 블룸버그통신은 “인텔이 중국 청두 공장에서 반도체 재료인 실리콘 웨이퍼 생산을 늘리려고 했지만, 바이든 행정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중단시켰다”고 보도했다.
전임 트럼프 행정부 시절 본격화된 중국 테크 기업들에 대한 미국의 제재는 바이든 행정부 들어 더욱 강화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1일 미 연방통신위원회(FCC)가 ‘금지 목록’에 올린 회사들의 제품을 검토하거나 승인하지 못하게 하는 보안장비법에 서명했다. 미국 기업들이 장비를 교체하거나 새 장비를 주문할 때 금지 목록에 오른 회사 제품은 아예 검토조차 하지 말라는 초강력 규제로, 중국 화웨이와 ZTE를 겨냥한 법안이다. FCC는 화웨이와 ZTE의 통신 장비를 다른 회사 제품으로 교체하는 통신 회사들에 막대한 보조금까지 지급하고 있다.
일본 정부도 발 빠르게 미국의 손을 들어줬다. 요미우리신문은 14일 “일본 정부가 안전 보장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외국 제품이나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도록 사전 심사하는 법안을 만들 방침”이라며 “중국 제품을 배제하려는 구상”이라고 했다. 영국⋅스웨덴⋅호주도 미국을 따라 중국산 통신 장비 금지에 동참하면서 한때 중국 테크의 상징이었던 화웨이 매출은 올 들어 작년보다 30% 이상 줄어들었다.
미국의 강도 높은 압박에 맞서 중국은 독자 기술 개발에 나서고 있다. 중국 정부는 12일 자국을 대표하는 파운드리 업체 SMIC에 2조원을 추가 투자하기로 했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에도 SMIC에 2조원대 투자를 했다. 또 중소 혁신 기업의 자본 조달 창구 역할을 할 베이징증권거래소도 15일 개장한다. 중국의 유망 중소기업을 집중 육성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소재·부품·장비 제재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미국 제재의 첫 번째 타깃이었던 화웨이의 런정페이 최고경영자(CEO)도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그는 지난 3일 사내 온라인 게시판에 올린 영상에서 “평화는 투쟁을 통해서 성취할 수 있다. 그래야만 아무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IT업계에서는 미·중 테크 경쟁이 기존 국제 산업의 질서를 통째로 바꿔놓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첨단 장비 공급과 반도체 설계는 미국,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부품 공급은 한국, 완제품 생산은 중국에서 이뤄지는 글로벌 공급망이 깨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조대곤 KAIST 경영대학 교수는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 집중돼 있는 생산 시설을 다변화하는 방안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