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웨이퍼 /TSMC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15일(현지시각) ‘반도체 제조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한 ‘반도체 지원법’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동안 아시아와 미국의 반도체 공급업체에 의존했던 구조를 벗어나 반도체를 자급자족하는 판을 짜겠다는 것이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유럽의회에서 “디지털은 성패가 달린 문제”라며 “우리는 유럽 칩 법을 만들 것이고, 이는 유럽의 반도체 공급 안정성을 높이고 유럽의 테크 산업을 발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글로벌 자동차 기업인 GM이 중국의 상하이 모터그룹, 광시자동차집단과 중국에서 만든 합작벤처사 SGMW는 “현재 자체 자동차 칩을 개발 중”이라며 “5년 내 중국 현지에서 생산한 칩을 자동차에 적용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전 세계가 반도체 각자도생·자급자족 시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중국 등 일부 국가가 ‘반도체 굴기’를 외치며 자국 반도체 생태계를 꾸리려는 것을 넘어 수많은 국가와 테크 기업들이 자기들만의 반도체를 만들고 관련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컴퓨터 CPU는 인텔과 AMD, 스마트폰 칩은 퀄컴 등에서 공급받아 IT 기기를 만들던 글로벌 공급망 체계가 흔들리며 세계 테크 지형도가 변하는 것이다.

애플이 작년 자체 제작한 맥북용 칩 M1. /애플

◇모두가 한목소리로 “반도체 자체 제작”

IT 전문매체 디인포메이션은 지난 9일 페이스북이 AI 머신러닝(인공지능 기계학습)용 칩을 자체 개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페이스북은 이 칩으로 사용자의 녹화 및 라이브 스트리밍 비디오 시청 품질을 향상시킬 계획이다.

페이스북뿐만 아니다. 전 세계 내로라 하는 테크 기업들은 모두 자체 칩을 개발 중이다. 테슬라는 지난달 미국 실리콘밸리 팔로알토 본사에서 AI데이 행사를 갖고, 자체 개발한 AI 전용 칩 D1을 통해 슈퍼 컴퓨터 ‘도조’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애플은 작년 11월 맥북에 들어가는 자체 M1 프로세서를 개발했고, 중국의 바이두는 지난달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는 자체 개발 AI 칩 ‘쿤룬2’을 대량 생산하고 있다고 밝혔다. 닛케이아시아는 지난 1일 “구글이 크롬OS 기반 노트북과 태블릿에 들어가는 CPU를 2023년쯤 출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국가 단위에서도 자체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미국은 작년 반도체 산업 지원법인 ‘칩스 포 아메리카’를 만들고 미국 내에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면 100억달러(11조7000억원)의 연방 보조금과 최대 40%의 세액공제 혜택을 주겠다고 했다. 반도체 굴기를 천명하며 오랜 기간 반도체 자급자족을 노렸던 중국도 생각만큼 반도체 산업이 성장하지 않자, 작년 8월에 28나노 이상 공정을 도입하면 영업 기간 15년 이상인 기업에 대해 최대 10년간 법인세를 면제해주는 혜택을 내걸었다. 일본, 대만도 자국 내 반도체 관련 산업을 육성하려는 정책을 강하게 추진하고 있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이 15일(현지시각) 유럽의회에서 유럽 내 반도체 제조 생태계 구축을 위한 '반도체 지원법'을 만들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유럽연합

◇글로벌 반도체 공급사슬에 큰 변화

이러한 국가와 기업의 움직임은 오랜 기간을 거쳐 형성된 전 세계 반도체 공급사슬에 변화를 주고 있다. 그동안 반도체와 첨단 IT 기기의 생산은 미국에서 반도체를 설계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과 대만 등에서 반도체를 만들고, 이 칩을 받아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던 중국에서 IT 기기를 조립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모든 산업에 디지털화가 진행되고 이를 구동하는 반도체의 중요성이 갈수록 부각되면서 반도체를 국가 안보와 기업 생존의 핵심 과제로 보는 시각이 늘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국가 간 물류가 정상대로 진행되지 않으면서 글로벌 공급망은 크게 흔들렸고, 이는 자체 칩을 개발하거나 자체 반도체 생태계 구축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삼성전자 화성캠퍼스의 반도체 생산라인. /삼성전자

◇삼성전자 득보나

반도체 업체들은 빠르게 변하는 반도체 산업 지형도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테크 업계에선 이러한 변화가 기존 반도체 설계 분야 강자인 퀄컴과 인텔, AMD 등에 위협이 될 것으로 본다. 그동안 개발한 반도체를 사줬던 고객들이 빠르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낮은 수준의 반도체인 자동차용 칩을 개발하고 생산하던 업체들도 위기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유럽과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해외 업체들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계도 뒤바뀔 가능성도 있다. 최근 인텔이 유럽 국가들에 파운드리 시설 투자를 요청하고, 유럽용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겠다고 약속하는 배경엔 이런 상황이 있다는 것이 테크 업계의 공통적인 분석이다.

하지만 이런 지각변동이 최첨단 반도체를 위탁 생산하는 대만의 TSMC나 한국의 삼성전자에는 오히려 득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중국이 10년 가까이 반도체 굴기를 외치고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면서도 아직도 10나노 수준의 공정기술밖에 확보하지 못한 것이 주요 근거다. 그만큼 첨단 반도체 제조는 기술 개발 장벽이 높고, 막대한 설비 투자가 필요한 산업이다. IT 업계 관계자는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최고의 공정으로 만든 반도체가 필요하다”며 “결국 최고 파운드리 기술력을 가진 삼성과 TSMC 두 업체엔 고객이 몰리는 현상이 벌어질 것이고, 이는 아무리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더라도 단기간 극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