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의 한 대형 게임 업체는 신입 개발자에게 개발 업무 대신 숙제를 내준다. 게임 개발에 필요한 컴퓨터 언어를 공부한 뒤 간단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제다. 대학 2~3학년 때 배워야 할 기초적인 수준이지만 상당수 신입 사원이 이 과제를 어려워한다. 대학에서 정형화된 문제풀이식으로 코딩(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운 이들은 조금만 창의적인 주문을 하면 헤매기 일쑤라고 한다. 이 회사의 간부급 개발자는 “신입들이 회사 기출 문제를 달달 외우고 입사 시험을 보는 경우가 많아 실제 프로그램 개발 능력은 엉망인 경우가 수두룩하다”며 “1대1로 붙어서 기초부터 가르쳐야 하니 답답하다”고 말했다.
최근 기업마다 인사 담당자들이 “고스펙 졸업생은 넘치는데 원하는 인재가 안 보인다”고 하소연한다. 한국 산업에서 반도체·배터리·소프트웨어 같은 첨단 기술 비중이 커지면서 기술 인력 수요가 급증했지만, 대학 졸업생들의 수준이 기업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반도체 업체 고위 임원은 “신입 사원 상당수는 전공 교과서만 봤을 뿐 반도체 라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견학 한번 못해봤다”면서 “대학의 반도체 관련 학과 교수들에게 10년 넘게 변화를 호소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고 말했다.
◇”SKY 출신 뽑아도 현장 적응까지 1년”
게임·소프트웨어·AI(인공지능) 업계에서는 “최근 모든 산업 분야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개발자 구인난은 대학 교육에 원인이 있다”는 말이 나온다. 실제로 상위권 대학 컴퓨터 관련 학과에서조차 코딩을 직접 하는 것보다는 이론적인 배경을 가르치는 데 집중한다. 수도권 4년제 대학 컴퓨터공학 전공 교수는 “코딩 수업은 교수가 아닌 강사가 맡는 경우가 일반적이고, 혼자서 많은 학생을 가르치기 힘들다 보니 원론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데만 주력한다”고 말했다. 게임이나 인터넷 업계에서 실제로 쓸 수 있는 코딩 응용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구조라는 것이다.
배터리 업계에선 아예 연구직 뽑기가 힘들다. 삼성·LG·SK 등 대기업들은 최근 들어 전기차 배터리 사업 비중이 커지면서 전해질·전극 소재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화학 전공자뿐 아니라 이들 소재를 효율적으로 포장하는 모듈 분야 엔지니어 수요도 커졌다. 하지만 기업들은 개발 인력의 60~70%는 화학 관련 전공자로 충원할 수 있지만 모듈 개발에 필요한 물리 전공자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막상 물리학 전공자를 뽑으면 화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배터리 회사 내에서 별도의 물리학 강좌가 개설되는 경우도 흔하다. 한 배터리 업체 개발자는 “LG 가 최근 오창 공장에 세계 최초로 배터리 전문 교육기관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는데, 반대로 말하면 한국 대학에선 이런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재 양성 여력 없는 중소기업 “키워도 대기업 이직”
중소 업체들은 인재 부족 문제가 더 심각하다. 성적이 좋은 상위권 대학 출신은 대기업이 싹쓸이하는 데다, 대기업과 달리 자체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여건도 안 되기 때문이다. 한 전자기기 중소 업체 대표는 “사비를 털어 신입 직원들에게 2~3년씩 직무 교육을 시켜줬더니 10명 중 9명이 대기업으로 가더라”며 “최근엔 아예 대졸자 대신 정년 은퇴를 한 시니어 개발자를 뽑고 있다”고 했다. 연매출 1조원 규모 중견 화장품 업체 대표는 “업계 평균보다 연봉 수백만원을 더 주고 스펙 좋은 수도권 대학 출신을 데려오지만 실험실 연구 경험조차 없는 경우가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학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 현장과 거리가 먼 이론식 교육에만 몰두한 탓에 인력 미스매치가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조대곤 KAIST 경영대학 교수는 “미국 MIT·프린스턴대, 싱가포르 난양공대와 같은 해외 기업들은 HP·인텔 등 글로벌 기업과 합작 연구소를 운영하며 대학과 기업에 필요한 개발 인력을 길러낸다”며 “산학 협력에 소극적인 대학이 현장형 인재 양성을 가로막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