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자국 기업 보호를 명분으로 한국의 법 제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우리 국회가 추진하는 소위 ‘구글 갑질 방지법’에 대한 반발이다. 구글은 내년부터 자사 앱 장터(스마트폰에서 사용하는 앱을 판매하는 온라인 공간) 내 결제를 의무화하고, 이 과정에서 일률적으로 수수료 30%를 가져가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에 대해 국내 인터넷 기업과 앱 개발사들은 “소비자 부담이 커지고, 중소 앱 개발사들의 고사가 우려된다”며 반발했고, 우리 국회는 법률 제정을 통해 이를 막겠다고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미 정부가 “특정 기업(구글)에 차별적인 법률 제정은 부당하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 정부는 구글·애플 앱 장터 사용 비율이 높은 한국에서 결제 의무화를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 경우 다른 국가로도 확산돼 자국 기업 피해가 커질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구글과 애플은 전 세계 앱 장터 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다. 이를 두고 국내 IT 업계에선 “미국 정부가 자국 내에서는 독점을 이유로 테크 공룡을 상대로 반(反)독점 소송을 제기하면서도 다른 나라에서는 자국 기업 이익을 위해 독점도 묵인하겠다는 이중적 태도”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독점 미국선 NO, 외국선 YES?
14일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의원실에 따르면 주미(駐美) 한국 대사관은 지난달 3일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방송통신위원회·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 부처에 ‘구글 등의 앱스토어 운영 정책 관련 USTR 부대표부 유선 통화 결과’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냈다. USTR은 다른 나라와 무역 협상을 수행하는 정부 기관이다. 이 공문에는 주미 대사관 상무 라인과 USTR 부대표 간 통화 내용이 포함됐는데, 최근 논란이 된 구글 앱 수수료 결제 관련 미국 정부의 입장이 담겼다.
USTR 부대표는 통화에서 “현재 한국에서 구글 갑질 방지법이라며 논의하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이 특정 기업을 표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우려되며, 통상 문제 등에서 국익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구글의 앱 장터 내 결제 강제에 맞서 국내 IT 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추진하는 법 개정안을 미 정부가 사실상 막고 나선 것이다.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은 앱 장터 운영사(구글·애플)가 자사의 인앱 결제 시스템을 강제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앱 개발사는 모든 앱 장터에 동등하게 앱을 올려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에서도 논란인데…
구글·애플의 앱 장터 의무 결제화는 미국 내에서 큰 논란이 됐다. 구글과 애플은 자사 앱 장터에서 유통되는 모든 앱을 대상으로 자사의 결제 시스템을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앱 매출의 30%를 수수료로 받는다. 미국 게임 회사 에픽게임스는 최근 구글과 애플을 상대로 수수료 지급을 거부했다가 앱 장터에서 퇴출당했다. 에픽게임스는 두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구글은 인도 등에서 앱 장터 결제 의무화에 대한 반발이 거세자 도입 시기를 한 차례 연기하기도 했다. 서비스 업체 스포티파이는 지난해 초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 “앱 수수료가 과도하다”며 애플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일본·호주 규제 당국도 구글의 앱 장터 정책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이 우리 정부를 압박하고 나선 건 한국에서 구글 앱 장터 내 결제 의무화를 막은 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비슷한 갈등을 빚는 다른 나라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디지털세 등 세계 각국과도 갈등
미국 정부는 디지털세(稅) 부과 문제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달 말 구글·아마존·페이스북·애플 등 미 테크 기업에 올해 디지털세 납세분을 고지했다. 디지털세는 한 국가에 고정 사업장을 두지 않은 글로벌 IT 기업을 대상으로 자국에서 올린 디지털 서비스 매출을 기준으로 세금을 매기는 제도다. 프랑스는 최소 연 수천억원의 디지털세 부과를 추진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달 애플의 애플페이 반독점 행위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애플을 시작으로 구글 모기업인 알파벳, 페이스북, 아마존에 대한 반독점 조사도 시작한다. 영국·캐나다도 미 테크 기업들에 대해 디지털세를 부과할 계획이다.
이에 미 정부는 미국 정부가 교역 상대국의 불공정한 무역 관행에 대해 보복 조치를 할 수 있는 ‘무역법 301조’를 근거로 보복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맞섰다. USTR은 내년 1월부터 화장품·핸드백 등 13억달러 규모 프랑스 수입품에 대해 25%의 징벌적 과세를 부과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면서도 미국 연방·주 정부는 지난해부터 구글·아마존·페이스북·애플에 대해 강도 높은 반(反)독점 조사를 벌이고 있다. 지난달엔 구글, 이달 초엔 페이스북을 각각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연방법원에 제소했다.
IT 업계는 “트럼프 대통령이 자국에선 테크 기업들을 반독점이라는 이유로 때리면서 대외적으로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자국 기업의 독점 행위를 오히려 부추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