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임원 출신 A(59)씨는 금융자산 30억원 정도를 은행과 증권사로 비슷하게 나눠 관리하다가 최근 은행 쪽 자산을 대거 증권사로 옮겼다. 증권사에서 추천하는 단기 채권 펀드에 5억원, 지수형 주가연계증권(ELS)에 3억원가량을 투자했고, 증권사를 통해 국내외 유망 주식도 5억원가량 매수했다. 증권사에 맡긴 돈이 20억원을 넘은 것이다. A씨는 “글로벌 증시가 계속 오르는 데다 은행 예금은 ‘금고’ 역할밖에 하지 못하다 보니 답답해서 증권사 쪽으로 자금을 많이 틀었다”고 말했다.

초저금리 상황이 길어지면서 고액 자산가들의 투자 ‘베이스캠프’가 은행에서 증권사로 옮겨가는 모습이다. 은행은 업종 특성상 예금이나 채권 위주의 안정적인 자산 관리를 강점으로 내세우지만, 요즘은 시장금리가 0%대로 떨어져 웬만한 상품 수익률이 너무 낮기 때문에 강점이 부각되기 어려운 실정이다. 반면 증권사는 IB(투자은행) 부문을 중심으로 다양한 대체 투자처를 발굴해 상품화하는 등 수익률 측면에서 은행보다는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각광받고 있다.

주요 증권사별 ‘고액 자산가’ 관리 프로그램

◇증권사 ‘고액 자산관리’…"기관 투자자급 대우"

증권가에서 고액 자산가 관리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삼성증권이다. 삼성증권은 지난 2010년 예탁 자산 30억원 이상인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SNI 본부’를 만들어 고액 자산가 유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현재 SNI 본부에서 관리하는 고객 수는 2600여명에 달하고, 자산 규모는 80조원을 넘는다. 올 들어선 고객 증가율이 30%를 넘는다. 최근에는 고액 자산가 중에서도 100억원 이상의 ‘초고액 자산가’들을 위한 ‘멀티 패밀리오피스’ 서비스까지 출시했다. ‘패밀리오피스’ 서비스는 미국, 유럽 등에서 기업체 규모의 초우량 자산가들이 개인자산관리 회사(싱글 패밀리오피스)를 만드는 데서 착안한 ‘자산관리 특화 서비스’를 의미한다. 세계 최초의 싱글 패밀리오피스는 ‘석유왕’ 록펠러가 19세기에 록펠러 가문의 자산을 전담 관리하기 위해 직접 자산운용 인력을 고용해 설립한 ‘록펠러 패밀리오피스’다. 삼성증권의 멀티 패밀리오피스에 가입하면 기관투자자처럼 글로벌 상업용 부동산 인수, 인수합병(M&A) 딜 등 삼성증권의 각종 투자사업에 파트너로 참여할 수 있다. 박경희 삼성증권 SNI 전략담당 전무는 “투자 컨설팅과 세무·증여 상담 등을 해주는 것에 머물러 있던 국내 패밀리오피스 서비스를 확장한 것”이라며 “SNI를 10년간 운영한 결과 고객 중 글로벌 IB급의 패밀리오피스 서비스를 원하는 분이 많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다른 증권사들도 앞다퉈 고액 자산가 모시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국투자증권은 최근 금융자산 30억원 이상의 고객들을 관리하기 위한 ‘글로벌 웰스 매니지먼트(GWM)’ 조직을 만들었다. 글로벌 자산 관리와 함께 가업 승계를 위한 인프라와 네트워크까지 지원하고, 각종 법률 및 세무 자문까지 해준다. 미래에셋대우는 최근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인 고객을 대상으로 한 ‘미래에셋세이지클럽’을 출시했다. 미래에셋의 강점인 ‘글로벌 IB네트워크’를 활용해 다양한 투자 이슈에 대해 조언하며, 가업 상속과 증여 관련 전문 컨설턴트들의 상담도 받을 수 있다. 미래에셋대우도 올 들어 10억원 이상 고객이 33.3%나 증가했다. 이 밖에 NH투자증권과 KB증권도 각각 ‘프리미어블루 멤버스’와 ‘에이블 프리미어 멤버스’라는 이름의 고액 자산관리 서비스(모두 10억원 이상)를 운영하고 있다.

◇전문 리서치 인력 보유하고 ’10억원 이상'에 집중하는 증권사

고액 자산가들이 증권사를 더 많이 찾는 까닭은 단순히 초저금리 때문만은 아니다. 증권사는 전 세계 시장 흐름을 분석하는 ‘리서치센터’ 조직을 운영하는 데다 비교적 소수의 자산가만 관리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펴고 있다. 증권사에는 애널리스트와 같은 시장 조사 전문 인력이 수십명에서 수백명 있는데 이들은 고객 요구에 맞춰 전국 각 지점을 돌며 경제 및 시장 상황에 대한 분석 및 전망 세미나를 연다. 알기 쉽게 풀어 쓴 전문 분석 자료를 수시로 받아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은행의 고액 자산관리 문턱이 1억원이나 5억원으로 증권사보다 훨씬 낮은 것도 고액 자산가들의 발길을 돌리게 하는 부분 중 하나다. 인력은 한정적인데 VIP 고객 수가 너무 많으면 세심한 관리를 받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부자들은 일반 고객들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관리를 원한다”고 말했다.